“바로 이거야. 농사는 이렇게 지어도 되는 거지. 되고말고.”
정지아식 투기 농법에 대한 글을 읽고 안도하는 마음, 작가님처럼 훌륭한 사람과 내가 비슷하다는 동질감과 내 텃밭 농사가 응원받는 기분이 들어 키득키득 웃었다. 투기 농법은 그의 단편소설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정지아 작가는 지리산 아래 산골 마을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그 덕분에 박사마을이 되었다며 마을 사람들이 밭 갈아주고 씨를 뿌려주어 얼떨결에 10평 남짓 농사를 짓게 되었다. 평생 몸으로 하는 노동을 해보지 않은 작가에게 그것도 버겁다. 그래서 그는 투기 농법을 선택했다.
정지아식 투기 농법은 ‘마지막에 풀과 힘겨루기를 해서 살아남아 결실을 맺은 작물을 먹어주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대로 다시 풀어보면 이렇다. 풀을 뽑지 않고 풀과 작물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농사법이다. 인간인 나는 풀과 싸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풀과 작물이 지지고 볶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농법 되겠다.
방치농법 같은데? 투기 농법은 뭐가 좀 다른가? 부동산 투기의 그 ‘투기’는 설마 아니겠지? ‘투기’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철학을 담고 있다. 투기의 뜻은 ’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 하이데거나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의 기본개념‘이다. 풀을 뽑지 않아도 되는 당위성을 찾고 있을 뿐인데 말이 어렵다. 미래로 자신을 내던지는 ‘자기’는 풀인가? 작물인가? 농부인가? 당최 뭔 말인지? 그냥 풀을 뽑아야 하나?
그냥 뽑는다고 해서 뽑히는 풀이 아니었다. 특히 장마가 지나가자 풀이 쑥쑥 자랐다. 어찌나 급히 (‘빨리’로는 표현하기 부족하다.) 자라는지 무서웠다. 툭하면 귀신이 나와 오싹하게 하던 드라마 <악귀>보다 풀이 더 무서웠다. 드라마는 무서워도 재미라도 있다. 풀은 너무 무서워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장마 전까지는 오며 가며 쉬엄쉬엄 풀을 뽑을 만했다. 장마가 끝나자, 여름 햇빛과 비를 배부르게 먹은 풀을 당해낼 도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뭐, 싸우기도 전에 전의를 상실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런데 뒤통수가 따갑다. ‘저 사람들 밭은 왜 저 모양이야? 풀을 안 뽑고 왜 그냥 두는 걸까? 다른 작물 심어도 될 만큼 넓은 땅을 놀리니까 풀이 다 차지했네. 설령 농사는 안 짓는다고 해도 너무 지저분하잖아.’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직접 들은 적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동네 어른들이 우리 집 텃밭사진을 찍어 SNS에 올릴 것 같지 않은데도 신경이 쓰였다. 심지어 풀에게 놀림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 좀 뽑아 보슈’
이장님이 예초기로 마을길가의 풀을 깎았다. 덕분에 내가 주로 산책하는 길이 말끔해졌다. 말끔해진 길에 자극받아 나도 풀을 뽑기 시작했다. 몇 포기 뽑지도 않았는데 땀범벅이고 방금 전에 뽑은 자리에 새로운 풀이 배꼼 얼굴을 내미는 것 같았다. 땀을 많이 흘려 헛것이 보이나. 가수 나훈아 씨의 잡초라는 노래까지 미워질 판이다. 이름 모를 풀들아, 나한테 왜 그래? 이름이 있는데 불러주지 않아서 그런 거니? 정녕 풀을 그대로 두면 안 되는 겁니까?
투기 농법으로 수확한 작물은 풀과 싸워 이겼으니 얼마나 강인할까나. 그런 작물은 인간들 건강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밭에서 나고 자라고 죽고 말라 버린 풀은 밭의 거름이 된다고 한다. 따로 거름을 안 해도 되고 얼마나 좋은 농사법인가. 투기 농법에 대한 믿음을 단단하게 키우고 남들이 뭐라 하든 (솔직히 수군대는 사람들은 없다. 내가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눈치를 보는 거다.) 뻔뻔한 자세를 갈고닦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앗, 그런데 정지아 작가님이 신문사에서 텃밭을 취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어르신들을 부추겨 풀을 뽑았다.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