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담근다고, 왜? 우리 둘이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래. 사 먹으면 되잖아.”
처음에 남편은 장 담그기를 반대했다. 나는 담그고 싶었다. 지금껏 친정 엄마의 된장, 간장과 고추장을 먹었다. 예전에 몇 번 엄마의 된장이 똑 떨어져 시판 된장을 사 먹은 적이 있다. 맛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내 입맛에 맞지 않아서 그랬는지 암튼 찌개를 끓여도 국을 끓여도 나물을 무쳐도 내가 알던 된장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트에서 산 고추장은 그럭저럭 먹을 만했는데 된장은 아니었다. 친정엄마의 된장을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때가 오면 시장에서 사 먹어야지 했던 생각이 걱정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도 장을 담가야겠다.
마음은 먹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정 엄마의 된장을 여전히 먹을 수 있었고 아파트에 산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뤘는데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햇빛과 바람이 통하는 마당이 있는 집에 살게 된 내가 엄마에게 된장을 드려야 할 때가 되었다. 엄마는 몇 년 전부터 장 담그기를 힘들어하셨다. 내가 장 담글 때가 되었다.
“메주는 사자.”
“물론이지. 메주를 만들고 싶어도 지금은 늦었어.”
이웃사촌 시누이가 도와주겠다고 하자 남편의 마음이 돌아섰다. 인터넷 지식인들의 집단 지성을 눈으로만 읽을 때는 생기지도 않던 용기가 시누이가 돕겠다고 하자 용기가 생겼나 보다. 시장에서 메주를 다섯 덩어리 샀다. 우리 집 첫 된장이 될 메주다. 깨끗하고 예쁘다. 어릴 때 못생긴 친구들을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라고 놀리곤 했는데 왜 그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렇게나 예쁜 메주를 말이다.
장 담그는 날을 잡아야 했다. 메주만 있으면 아무 때나 담그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주로 음력 1월에서 3월까지도 장을 담그지만 지금은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받아 음력 3월에는 잘 담그지 않는다고 한다. 기온이 높아 상하기 쉬워 그렇다. 쌀쌀한 정월에 담그면 장이 상할 염려가 없어 아무 날에 담가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12 간지 중에 말에 해당하는 날이거나 손 없는 날에 담그기를 권한다. 말날은 양의 기운이 왕성하고 대지의 기운이 솟아나는 날이라 장을 맛있게 하는데 좋다고 한다. 별 걸 다 따지는구나 싶으면서 기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니까, 2023년 2월 말의 날 중에서 2월 17일로 정했다.
날을 정하고 며칠 전부터 준비를 했다. 메주를 씻어 햇볕에 말리고 항아리도 깨끗이 닦아 말렸다. 소금물도 미리미리 만들었다. ‘우리 집 첫 된장 맛있게 해 주세요.’ 기도와 함께 새벽 약수터에서 물을 떠 왔다. 수돗물을 앞에 두고 기도를 할 수는 없잖은가.
“염도계가 있어야겠네?”
“달걀이 더 나아. 어른들의 지혜잖아.”
“그래도 기계가 더 확실하지 않겠어?”
“어른들 말씀이 틀린 말 없더라. 달걀로 하자.”
소금물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장 담그기 레시피에 숫자로 적힌 소금의 양을 막상 눈으로 보니 어마어마하다. 이렇게나 많은 소금이 필요할 줄이야. 소금을 아무리 붓고 저어도 달걀은 눈곱만큼도 떠오르지 않았다. 살짝 찍어 맛을 보니 토할 것 같았다. 엄청 짜다. 달걀은 미동도 하지 않는데 된장이 짜게 될까 지레 겁난다. 소금을 그만 넣어도 될 것 같은데? 고민 끝에 어른들의 지혜를 믿고 따르기로 했다. 염도계도 없는데 어쩌겠나.
“우와~ 뜬다. 뜬다. 뜬다.”
“10원짜리 동전만 한가? 500원짜리 정도 되나?”
“아닌데. 작은 것 같아. 소금을 더 넣어보자.”
달걀이 500원짜리 동전만큼 떠올랐다. 소금물을 다 만들었다.
장 담그는 날!
D-day에 할 일이 가장 적은 작업을 꼽아보면 장 담그기는 무조건 해당할 것 같다. 생각보다 할 일이 적었다. 항아리에 메주 넣고 소금물 붓고 고추와 숯을 넣으면 끝이다. 이제 매일 한 번씩 항아리 뚜껑을 열고 햇빛과 바람을 쐬는 일만 부지런히 하면 된다. 장 가르는 날까지 말이다.
장독대가 없어 일단 마당 데크에 항아리를 두었다. 햇빛이 잘 드는 곳이다. 항아리를 닦으며 꿈을 꾼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여 장 담그기를 해볼까.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만들고 우리 집 마당 장독대에 두었다가 장 가르는 날과 장 나누는 날 다시 모여 자신들이 먹을 된장과 간장을 가져가는 모임을 만들어 볼까? 장 담그는 날, 장 가르는 날과 장 나누는 날은 잔칫날이 되겠구나. 김장하는 날은 김치와 수육을 먹으면 되는데, 장을 먹을 수는 없고 무엇을 나눠 먹으면 될까? 몇 명이나 함께 하자고 할까? 아무도 없지는 않겠지? 친정엄마에게 총 감독하시라고 해야겠다. 장과 함께 내 꿈이 익어간다.
2023년 2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