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의 특징 중 한 가지는 또래 친구 관계를 무척 중요시한다. 친구들과의 소속감을 통해 사회성이 완성되어 가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불안과 우울, 반항의 시기에 부모의 인정보다 또래 친구들의 수용과 인정이 훨씬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교복 자율화 시대
나의 중고등학교 시기를 생각해 보면 머리통이 익을 대로 익어 숙성되었다고 세상을 다 가질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행동에도 ‘멋을 아는 친구’라고 치켜세워주곤 했다. 중3 때 머리와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었지만, 중학교 졸업 때까지 교복을 입었고,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학생인지 앳된 사회인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했었다. 똑같은 머리모양과 교복이 획일화된 통제 수단이라고 자율화가 되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학생다운 멋스럽고 예쁜 교복 시대가 부활하였다. 그 전의 교복은 검은색에 흰 칼라가 대부분인 교복이었다면 새로운 교복은 색상과 디자인이 다양하게 진화되고 현대에는 활동이 편한 생활복까지 등장했다.학생은 역시 교복을 입어야 학생다웠다.
메이커 병의 시작과 교복의 부활
나는 겨우 중학교 3년 동안 교복을 입었고, 고등학생 때는 교복도 교련복도 없이 체육복을 입고 학교생활을 했다. 갑작스러운 교복 자율화로 여러 가지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똑같았던 학생 운동화와 학생 가방이 자취를 감추고 유명 상표들이 급부상하면서 소위 말하는 ‘메이커 병 시대’가 시작되었고 빈부의 격차가 여실히 드러났다. 우리 세대는 그 과도기의 실험 대상이었고 어쩌다 학교 행사가 있는 날이면 선배들의 교복을 빌려 입곤 했다. 그나마 내가 다닌 학교의 교복이 멋스러운 ‘세일러복’이었기에 졸업하기 전 어떻게든 입어보고 싶었다. 고입 시험을 거쳐 뺑뺑이로 배정된 학교였는데 그전 같으면 예쁜 교복 때문에 환호성이 터졌을 것이다. 세일러복을 입고 싶었던 소녀들은 사복을 입게 되니 교복을 더 입어보고 싶은 심리 작용도 한몫했으리라. 시내버스 종이 회수권을 받으며 버스 뒷문을 손으로 탕탕 치고 ‘오라이’를 외치던 학교 밖 또래 친구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봐야 했던 학생 교복에 얽힌 추억들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도회지에서의 낯선 학교 풍경
고입 연합고사를 치르기 위해 시험 전날 도시의 여관에서 긴장하고 있을 때 한 해 먼저 입학한 중학교 선배들이 찹쌀떡을 사 들고 응원 왔던 일, 타향살이의 시작을 알리는 고등학교 입학식, 교련 시간 삼각건과 붕대법 실기시험에 당황하던 일, 고3 때 학교 앞 독서실에서 잠을 깨우느라 새벽녘에 울려 퍼지던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음악 소음, 자취 짐을 옮기려고 혼자 손수레를 끌었던 친구, 늘 웃음이 가득한 친구, 뭐든지 불만이 많았던 투덜이 친구의 얼굴들이 느린 활동사진처럼 머릿속에서 지나간다.
‘안되면 될 때까지’라는 급훈 아래 보육원 봉사활동에 함께 해주셨던 고2 담임선생님, 학생 개인마다 추억의 작품 사진들을 찍어주신 사진가 화학 선생님, 음악 감상 시간에 코를 골게 만드는 섬세한 50대 총각 음악 선생님, 수업 시간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수학 선생님…. 모든 것이 추억 속 학교 풍경이 되었다.
조개탄 난로와 석유난로의 종류가 달라도 당번의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시골 중학교에서는 조개탄 난로를 사용했는데 도시 고등학교에 오니 석유난로를 사용하고 있었고 장작이나 석유를 배급받기 위해 당번이 줄을 서는 건 여전히 똑같았다. 교실 당번이 최고로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바로 도시락 뒤집기다. 쉬는 시간 난로 위에 쌓인 도시락을 위아래로 바꾸어가며 노릇노릇한 누룽지도 만들어줘야 하고 때로는 도시락통에 적당한 수분을 공급해서 타지 않게 해야 한다. 그 틈에도 쉬는 시간에 몰래 도시락을 까먹는 친구가 있었고 김치 익는 냄새는 점심시간을 재촉하는 촉진제였다.더운 여름 선풍기 바람에 의존하던 풍경이 에어컨이 빵빵 나오는 요즘 현대식으로 변화하고 있어도 옛날 교실 풍경이 그리운 것은 아마도 친구들과 공부하는 것 외에 고달팠던 시대를 함께 이겨냈다는 동질감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상아탑(대학)과 상아탑 학원의 경계는 ‘골목길’이 나누었다.
어느 시대건 고등학생들의 최종목표는 아마도 대학 입학일 것이다. 사춘기를 겪으며 반항하는 기질을 누르고 참아가며 대학 진학을 위한 몸부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내 고등학교 시절에는 학원이 있기는 했지만, 재수생이 대학을 가기 위해 다니는 입시 학원이었지 요즘처럼 재학생이 성적을 올리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재학생이 학원에 가는 것도 결국에는 대학을 가기 위한 한 발 앞선 선택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그 시절 금수저라 불리던 학생들만 과외수업을 받았을 것이다. 평범한 내 친구들 무리는 과외도 학원도 모르고 줄기차게 야간 자율학습에 얽매여 학교만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그 시절 여학생들의 우상인 잘 나가던 유명 가수가 쓰는 잠자리 안경을 끼고 싶었지만, 시력이 좋아서 안경도 낄 수 없었고, 콘서트 표를 얻기 위해 학생 잡지를 사기도 했었다. 그리고 ‘J에게’ 열풍으로 여고생들 모두가 J를 꿈꾸며 복제된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들었던 유행가요들,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치며 인근 고교 야구부 우승 기념 카퍼레이드를 구경하던 일, 학력고사 세대들은 공부에 대한 부담이 지금 학생들보다 훨씬 적었던 것 같다. 학교 선생님들이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상아탑에 갈래? 상아탑 학원에 갈래?”
하필이면 학교 정문 건너편 골목에 ‘상아탑 학원’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아침 등굣길에 재수생 선배들과 함께 걸었다. 어느 순간 골목을 향하여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재수생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재학생들은 가슴을 펴고 느릿느릿 걸으며 ‘나는 반드시 상아탑(대학)에 갈 거야!’라는 다짐을 하고 교문을 통과했었다. 몇 달 후면 또다시 학교 앞 골목으로 사라지는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을 텐데, 자기는 이 골목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세차게 머리를 흔들다가도 이내 말이 튀어나왔다.
“뭐 어쩌겠어? 상아탑에 가기 위한 일이라면 상아탑 학원을 거쳐서라도 가야겠지.”
(*상아탑: 코끼리의 위쪽 어금니인 상아로 이루어진 탑이라는 뜻, 속세를 떠나 조용히 예술을 사랑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이라는 뜻으로도 쓰임.)
학창 시절을 경험한 누구에게나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이 생각나 미소 지을 것이다. 그 기억을 안고 꿈 많았던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머리통이 숙성된 감성 많은 소녀 친구들이 나의 사춘기 시절을 함께 지켜주고 위안을 주었다. 입학해서 처음 만난 친구는 이렇게 자기소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