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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Dec 06. 2024

[7화] 그것이 나타났다


땅에 시선을 내리꽂은 채로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도중, 그녀는 무언가에 부딪혀 들고 있던 핸드백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자 거대한 벽이 보인다. 그 옆엔 그보다 작은 벽이 있다.



“아이씨, 너 뭐야?” 거대한 벽이 말한다. 알고 보니 벽이 아니라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서 있다. 그 옆에 있는 작은 벽은 여자친구처럼 보인다. 한눈에 보기에도 둘 다 썩 질이 좋은 편은 아니다. 더군다나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이다. 잘못 걸린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가던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발걸음을 멈춘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그녀를 붙잡은 것이다.

“이년아, 사과 똑바로 안 해? 씨발, 너 내가 만만해 보이냐? 얼굴을 보고 미안하다고 해야 될 거 아냐!” 옆에 있는 여자가 깔깔거리며 ‘그러지 말라’는 둥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그녀는 무섭지만 그보다 더한 공포가 온몸에 퍼지는 걸 느낀다. “왜, 왜 이러세요!” 그녀는 거칠게 남자의 손을 뿌리친 채 뒷걸음치다 넘어진다.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니 남자의 덩치가 아까보다 훨씬 더 커 보인다. 뒤에서 강하게 비치는 조명 때문에 남자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위험하다.



‘어떡해’, ‘싸움 났나 봐’, ‘무슨 일인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 곁에 다가오진 않는다. 그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아무도 그녀 곁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공포스럽다.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가장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만이 그녀와 가까워진다. “하, 안 그래도 오늘 기분 더러운데 별 미친년을 다 만나네. 넌 뒤졌어.” 남자는 거칠게 자신의 옆에 있던 여자도 밀쳐내고 서서히 그녀에게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그녀는 최대한 그와 멀어지기 위해 앉은 채로 손바닥과 발로 바닥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선다.



“오, 오지 마!”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녀는 깨닫는다. 이거였구나. 그와 동시에 주변에서 낄낄 대는 소리가 들린다. 카페에서 들었던 그 소리다. 남자는 비틀거리면서도 그녀가 뒤로 물러나는 속도보다 더욱 빨리 걸어온다. 그녀는 뒤로 도망치던 중 팔에 힘이 빠져 등부터 뒤로 넘어진다. 팔에 느껴지는 고통보다 느껴지는 공포감이 그녀를 발버둥 치게 만든다. 낄낄. 아까보다 웃는 소리가 더욱 커진다. 남자는 그녀를 보며 잠시 멈칫거리더니,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여 그녀를 바라본다. 여전히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지만 히죽거리는 듯하다. 그녀는 반쯤 누운 상태로 몸을 덜덜 떨며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남자는 먹잇감이 도망칠 의지가 없다는 걸 안 포식자처럼 서서히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다. 낄낄. 비명소리와 더불어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이내 그녀의 앞에 쭈그려 앉은 남자의 표정이 보인다. 파란색으로 빛나는 눈,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있는 피부, 일그러진 미소 사이로 지독하게 풍기는 술과 담배 냄새. 오늘 하루 처음으로 자신과 제대로 눈을 마주친 유일한 사람이지만, 제일 사람 같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남자가 팔뚝만큼 거대한 손바닥을 하늘 위로 들어 올리자,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더불어 웃음소리가 훨씬 더 커지며 공간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다. 잠시 후 거대한 기둥 다섯 개가 그녀를 뭉개버릴 듯 쏜살같이 내려오는 것과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온 공간에 가득 퍼진 웃음소리를 끝으로 그녀는 정신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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