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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Nov 22. 2024

[5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건 싫다


어느새 6시가 되었다. 이 회사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정시 퇴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그리 큰 장점은 아니다. 하루종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듣고,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 제도의 문제를 가지고 사과해야 한다면 당연히 퇴근은 제때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잔액이 없다며 손님에게 핀잔을 준 형편없는 아르바이트생이 만든 아메리카노 때문인지, 아까 잠깐 쉴 때 급하게 먹은 샌드위치 때문인지 속이 영 좋지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사실이다. ‘집에 가기만 하면 편하게 푹 쉴 수 있어.’ 그녀는 직장 동료들과 대충 인사를 한 뒤 빠르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는 다시 출근한 길로 퇴근 중이다. 여전히 꿈속에서 봤던 모습이 떠오르지만,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피곤하다. 술집 곳곳엔 불이 켜져 있으며, 금요일이라 그런지 이미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꽤나 보인다. 그녀는 이 거리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며, 싫어하는 이유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를 좋아하는 동시에 싫어한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덜 들을 수 있지만, 굳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들리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무언가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고 확신에 차서 말을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일수록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편이 더 많았다.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쌓고 아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타인에 대해 쉽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할머니는 결코 평범하진 않았지만 남들에 대해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슬프게도 할머니의 딸은 그와 정반대였지만.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와 자신의 앞에서의 모습이 많이 달랐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꽤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친절하고 상냥하며 조금만 실수를 해도 곧잘 사과를 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 앞에선 전혀 다르게 돌변했다. 할머니가 없을 때면 어머니는 그녀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혼잣말로 구시렁거리곤 했다. ‘사람들이 떠받들어주니까 자신이 대단한 줄 안다’, ‘평판에 비해 돈을 적게 번다', ‘돈을 쓸 줄 모른다’ 등등. 하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절대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없으면 자신이 온전히 그녀를 키워야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어머니가 어리석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아무리 할머니에게 미움을 샀더라도, 할머니는 그녀를 끝까지 책임질 사람이었으니까.






반대로 할머니는 소위 남들에게 '지랄맞은' 사람이었다. 어머니와는 달리 굳이 남들에게 예쁘게 말하는 편은 아니었다. 한번은 할머니를 찾아온 중년 남성이 자신을 도와주면 돈은 원하는대로 주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결국 그녀가 예상한대로 그는 도움은커녕 욕만 한 바가지를 먹고 쫓겨났다. 평소 할머니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도 종종 할머니에게 '너무 고집만 피우지 말라'는 충고를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손녀를 위해서'라는 말이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세상 두려울 것 없는 할머니를 유일하게 진정시킬 수 있는 건 딱 하나, 바로 그녀였다.


할머니는 그녀가 어머니를 욕하거나 원망할 때 단 한 번도 그녀 또는 어머니를 욕한 적이 없었다. 매번 그녀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느그 엄마가 그래 된거는 다 내 때문이라. 할미가 우리 강생이한테 참 미안하다.” 그녀는 그 순간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안아주면 그녀는 더 이상 어머니를 욕할 수 없었으니까. 할머니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할머니는 세상 그 누구보다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지만,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손녀를 사랑하는 평범한 할머니였다. 그녀도 할머니의 손녀였기에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에겐 안쓰럽고 착한 손녀였지만, 밖에서는 차갑고 냉정하며 결코 평범하진 않은 여자아이였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 보거나, 자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뭐라도 아는 척 말하는 걸 정말, 정말로 싫어한다.






그녀는 길을 걸어가다 한 곳을 바라본다. 며칠 전 작은 해프닝이 일어났던 곳이다. 퇴근 후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웬 할머니가 저 자리에 서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동네에 살면서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에, 그녀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사실 사람인지도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일부러 시선은 바닥에 둔 채 천천히 걸어갔다. 마침내 할머니의 옆을 지나칠 때, 할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뭐 한다고 그리 힘들게 살까. 그냥 살지.” 취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보다 할머니의 나지막한 한 마디가 훨씬 깊숙이 그녀의 귀를 통해 가슴이 꽂혔다. 사실 그때 무섭거나 두려운 감정보다 강렬했던 건 ‘분노’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비슷한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반응했을 때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녀는 간신히 화를 억누른 채 집으로 향했다. 샤워를 하고 잠에 들기 전까지 그녀는 계속 후회했다. 제대로 한 마디 해줄걸. 당신은 뭘 그렇게 잘 사는데.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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