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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Nov 15. 2024

[4화] 할머니의 손녀지만 엄마의 딸은 아냐


그녀는 커피를 들고 카페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는다. 그늘이 없어서 햇빛이 뜨겁긴 하지만 칙칙한 사무실에 앉아 전화를 받는 것보단 훨씬 낫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즐비하다. 멍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중,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문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움직임이 느린 사람이 하나 있다. 며칠 동안 머리를 감지 못한 듯 떡진 머리와 허름한 옷차림을 한 채 리어카에 잔뜩 폐지를 싣고 걸어가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그녀는 새벽부터 일어나 폐지를 주워도 하루에 그가 벌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아무리 잘 쳐줘도 만원도 벌기 힘들 것이다.


그녀는 아까 카페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자신이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나 싶어, 조금 더 긍정적인 상상을 하기로 해본다. 과연 저 할아버지는 처자식이 있을까. 어쩌면 저런 일을 하고 싶지 않은데 먹여 살릴 사람이 있어 저렇게 움직이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상상을 하자 문득 저 할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할아버지와는 다르게.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할아버지에게 고정한 채 커피 한 모금을 천천히 들이킨다. 지독히도 쓰다. 이건 산미고 뭐도 아니다. 그저 그런 원두를 사용했을 때 나는 맛이다. 한때 그녀는 바리스타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꿈보다는 당장 먹고사는 게 중요했고 바리스타라는 직업은 그녀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벌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꿈을 포기했다. 맛있지만 비싼 커피보다 카페인을 충전할 수 있는 값싼 커피를 택했다. 저렴한 커피는 지독히 썼지만 계속 마시다 보니 이젠 적응이 되어버렸다.


사실 쓴 맛을 견디는 건 그녀에겐 익숙한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유난히 약했던 그녀에게, 할머니는 몸에 좋다는 약재들을 달여서 먹이곤 했다. 맛이 없다며 떼를 써도 할머니는 단호했다. “빨리 무라. 그래야 얼른 낫제. 안 그라믄 아프질 말던가.” 웃긴 건 할머니도 쓴 걸 정말 싫어했다는 것이다. 그녀와 달리 할머니는 굉장히 건강한 편이었지만, 아주 가끔 심한 감기몸살을 앓기도 했다. 그럴 때 그녀가 할머니와 똑같은 말을 하며 약을 권하면, 할머니는 눈을 흘기며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할머니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았다.






반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달랐다. 처음 할아버지를 만난 건 그녀가 중학교 때였다. 할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찾아온 어머니는,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겠다며 나가자고 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어머니는 긴장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했다. 택시에서 내린 뒤 어머니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한 레스토랑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고급스러운 차 한 대가 음식점 앞에 멈추더니, 그 안에서 말쑥한 차림의 노신사 한 분이 차에서 내렸다. 누가 봐도 어머니와 판박이였다. 그녀는 단박에 그 사람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아챘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이 그녀의 할아버지라고 말한 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악수를 청했고 이내 그들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모두 고르라고 했다. 그녀는 하나만 골랐지만 그와 어머니는 그녀가 고르지 않은 음식들도 추가로 여럿 주문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웃지 않았다.






식사를 하는 내내 어머니는 그가 그녀의 할아버지이며,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에 대해 설명했고 그는 말없이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3명이서 식사를 하는 것치곤 음식의 양이 지나치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음식을 남기지 않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지만, 그래도 남은 음식은 너무 많았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다 먹었으면 나가자고 말했고, 그때 처음으로 그녀는 그들에게 말했다. “음식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포장해도 돼요?” 여전히 할아버지는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고, 어머니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만약 먹고 싶으면 언제든 자신에게 말하면 사줄 수 있다고 말이다. 그들은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겠지만, 그녀도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어머니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굉장한 부자이며, 언제든 도움만 청하면 그녀를 도와줄 수 있다고 말이다. 결국 그녀는 참다못해 어머니에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돈이 많아?” “응. 이쪽 지역에서는 아주 유명한 분이셔.” “그런데 왜 할머니는 안 도와줘? 자기 아내잖아.” 그때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배웅해 주곤 사라졌다. 그때 그녀는 확신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딸이며, 자신은 할머니의 손녀라는 것을.






그때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12시 45분. 점심시간이 끝나기 15분 전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한 번 크게 쉰 뒤 남아 있는 커피를 입에 모두 털어 넣었다. 그리곤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얼음 하나를 입에 넣고 나머지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회사로 들어가기 전, 그녀는 멈칫하며 뒤를 돌아본다. 리어카 위에 가득 실은 폐지가 바람에 날려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할아버지는 힘겹게 그것들을 줍고 있다. 길을 걷던 아주머니 한 명이 그를 도와주러 다가가고 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 시간을 보고, 고개를 들어 다시 그들을 본다. 살짝 입술을 깨문 뒤 그녀는 회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잘했네. 무시해, 저런 건. 그녀는 검지손가락으로 한쪽 귀를 신경질적으로 파면서 다시 어두운 회사 안으로 빨려가듯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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