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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Nov 02. 2024

[3화] 커피 한 잔 값이 부족했다


처음 그녀가 할머니에게 '그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던 건 자신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할머니는 그녀가 자신의 일을 이어받는 걸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녀가 이유를 묻자, 할머니는 그녀의 심성이 이 일을 할 정도로 단단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매우 상처를 받아 며칠 동안 할머니와 제대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토록 화가 난 건 할머니가 반대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그녀를 그렇게 본 건, 다름 아닌 그녀를 ‘어머니의 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실 할머니가 반대를 했더라도 그녀가 끝까지 하겠다고 우겼다면, 할머니도 자신을 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또한 그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란 자신이 가득 한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그들의 논쟁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지금은 어느 정도 할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그녀는 자신이 ‘할머니의 손녀’이지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그 정도로 나약하지 않아’ 속에서 화가 또다시 들끓으려는 찰나, 다행히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받을 바엔 차라리 바쁜 게 낫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힘없이 전화를 받는다.





       

셀 수 없이 많은 전화를 걸고 받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는 잠깐의 휴식을 부여받는다. 아침에 산 샌드위치를 입에 구겨 넣듯이 먹고 나서 음료수를 한 입만 마신 후 회사 밖을 나선다. 이때가 그녀의 하루 중 그나마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따뜻한 햇살을 힘겹게 헤치며 그녀가 도착한 곳은 카페이다. 사실 이곳보다 더 가까운 카페가 있긴 하지만, 가격이 이곳보다 비싼데다 직장 동료들과 마주칠 수도 있다 보니 그녀는 이곳을 자주 애용한다.


짤랑. 카페 문을 열자 문에 달린 방울이 소리를 내지만 여전히 내부는 고요하기만 하다. ‘그럼 그렇지.’ 그녀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찬다. 손님은 없지만 카운터엔 분명히 사람이 있다. 그저 손님이 들어와도 관심이 없는 것뿐이다.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카운터로 걸어간다. 발에 힘을 주어 발자국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니, 그제야 앉아 있던 여자가 어기적거리면서 일어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주문하시게요?” ‘뭘 당연한 걸 물어봐.’ 속으로만 외친 채 그녀도 대답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요.” 주문을 받은 여자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포스기를 누르며 말한다. “가져가실 건가요?” 그녀는 다시 한번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나 한가한 카페에 누군가 똑같은 시간에 와서, 똑같은 메뉴를 한 달 정도 주문하면 대부분은 기억하지 않나? 도대체 언제까지 물어볼까.


속마음과는 달리 그녀는 태연한 척 연기하며 대답한다. “그럼요.” 평일 점심시간에 한가하게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실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이 여자는 알고나 있을까.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포스기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대답한다. “이천오백 원이요.” 그녀는 말없이 카드를 내밀고 여자는 카드를 받아 느긋하게 계산을 한다. 계산하는 그녀의 실력 또한 한 달 전과 다를 게 없다. ‘빨리 좀 계산해라. 난 지금 1분 1초가 급하다고. 한가하게 카운터에 앉아 있는 너 같은 사람이랑은 달라.’ 순간 비슷한 상황에서 그녀가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화 좀 누르고 살아라. 그래야 니가 별탈없이 산다. 할매가 더 말 안 해도 알제? 그리고 니도... 그때가 생각나니 당혹스럽다. 작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스른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기분을 느끼며 계산이 끝나길 기다려본다. 하지만 이내 여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더니,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뭔가 불안하다. 잠시 후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귀 안을 아프게 울린다. “혹시 다른 카드 있으세요? 잔액이 부족하다고 나오네요.”

     

순간 그녀는 갑자기 뜨거운 물에 빠진 것처럼 체온이 확 올라간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한 티가 나지 않으려 애쓰며 최대한 여유롭게 지갑에서 다른 카드를 꺼내 내민다. 이제는 그녀가 카드를 받는 여자의 손을 보고, 여자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삐비빅. 결제가 되고 영수증이 출력되는 소리가 들리자, 한결 안심이 되지만 여전히 그녀의 몸은 불에 덴 듯 후끈거린다.


이윽고 영수증과 함께 여자가 두 개의 카드를 그녀에게 돌려준다. 그녀는 여자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볼지 감히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잔액이 부족해 다른 카드를 쓴 사람의 지갑 안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여자가 보지 못하게, 재빨리 원래 있던 위치에 카드를 넣은 뒤 지갑을 닫는다. 잠시 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나온다. 여자가 커피가 나왔다는 말을 하기 전, 이미 그녀는 픽업대 앞에 서 있다. 여자가 커피를 내려놓자마자 그녀는 커피를 받아 쏜살같이 밖으로 걸어 나간다. 여자가 인사를 하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저 그녀에게 중요한 점심시간이 1초라도 낭비되는 것이 싫을 뿐이다. 카페를 나오기 전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만 그것도 그녀에겐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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