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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Oct 11. 2024

[2화] '그것'이 다가온다


이제 그녀는 횡단보도를 건넌 뒤 양쪽에 술집들이 즐비한 도로로 진입한다. 술집들이 많은 도로 대다수는 아침이 되면 못 볼 꼴인 경우가 많다. 다행히 오늘은 금요일이라 썩 나쁜 상태는 아니지만 오늘 저녁부터 점점 심해질 것이며 월요일 출근길은 최악이 될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최악의 길로 출근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바로 출근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비위가 제법 강한 그녀조차 이런 생각이 들 정도면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시간이 좀 더 걸려도 돌아가는 방법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 그녀도 다른 길로 출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도로의 상태 때문이 아닌, 그녀가 며칠째 똑같이 꾸는 꿈의 배경이 바로 이 길이기 때문이다.





     

꿈의 내용은 단순하다. 지난주 처음 이 꿈을 꿨을 때 그녀는 캄캄한 저녁, 이 길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양쪽에 있는 술집들은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어서 그다지 무섭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저 멀리 무언가 검은 것이 일렁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밤의 어둠과는 다른, 이질적인 검은색이었다. 처음엔 ‘내가 잘못 본 건가’라는 생각을 했고 ‘그것’과의 거리도 꽤나 멀었기 때문에, 꿈에서 깬 직후에도 별생각 없이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엔 그 형체가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발을 떼려고 했지만 그제야 자신의 발이 지면에 붙은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두운 형체는 제자리에서 일렁이기만 할 뿐, 막상 꿈에서 자신에게 다가오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주가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월요일부터 ‘그것’은 꿈에서도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속도는 아주 느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조금씩 다가오는 게 그녀의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 화요일이 되자 ‘그것’과의 거리는 약 20m 정도에 불과했고 더불어 이제는 ‘그것’이 웅얼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성인 남자가 입에 음식을 잔뜩 넣은 채로 입을 벌리지 않고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수요일부터는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그것’의 모습과 웅얼거리는 소리에 이어, 그보다 훨씬 낮은 저음의 남자가 고함을 치는 소리와 함께 꿈에서 깼다. 그녀가 꿈속에서 할 수 있는 건 ‘그것’에게 다가오지 말라며 소리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리고 오늘, 불과 1m도 안 되는 거리까지 ‘그것’이 다가왔다. 그런데도 그녀는 출근을 위해 잠을 잘 수밖에 없고, 잠을 푹 자지 못하다 보니 아침에 10분이라도 더 자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 이것이 그녀가 소름 끼치는 꿈을 꾸는데도 그 꿈에 나온 거리로 출근하는 이유였다. 할머니가 있었다면.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자 그녀는 그 생각을 더 많이 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없다. 그녀도 그것을 안다. 그저 생각만 한 번 해 본 것뿐이다. 바랄 수 없는 걸 바라게 되면 본인만 힘들다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은 할머니가 자신의 곁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도로를 빠져나오자 저 멀리 회사의 형체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순간 '그것'과 마주치더라도 왔던 길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발걸음은 점점 더 빨라진다. 기쁜 동시에 슬픈 사실은, 곧 그녀에게 닥칠 일들에 비하면 이 순간이 최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출근을 한 후 불과 30분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녀는 몇 번째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콜센터 상담사로 일을 하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부족한 사람인지 타인의 입을 통해 알게 된다. 회사의 정책과 내규대로 하는 것뿐인데도 그녀는 매일 미안한 사람이 된다. 회사는 회사대로, 고객은 고객대로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문제는 서로가 요구하는 것이 정반대라는 것이고, 중간에 끼인 그녀에겐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거다. 물건을 판 건 회사고, 구매를 한 건 전화기 속 너머 이름 모를 '그것'이다. '그것'이 무슨 이유로 그 물건을 샀고, 어떤 하자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전화를 받고서야 알게 된다. 그렇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통화가 길어지고, 통화가 길어지면 '그것'과 자신 모두 다른 의미로 힘들어지는데, 보통 더 힘들어지는 건 그녀 쪽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대부분 원하는 것을 얻는 반면, 그녀는 잃는 것에 비해 얻는 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토록 죄송하다는 말을 쉽게 하는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그녀가 이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다소 힘들었지만 점점 별생각 없이 사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카드를 넣고 버튼을 누르면 돈을 토해내는 ATM기계처럼 수화기 너머 '그것'이 자신에게 발생한 문제로 분노를 그녀에게 주입하면, 그녀는 곧바로 사과를 토해낸다. 부작용이 있다면 그녀가 유난히 사과를 많이 토해내는 날엔 퇴근 후 실제로 구토를 할 때가 있다는 것 정도다.


두 번째 이유는 할머니 때문이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그녀에게 화를 억누르지 못하면 큰 화가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할머니만큼 그녀를 잘 아는 동시에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할머니가 말하는 것처럼 그녀 또한 자신이 화가 많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화를 누르는 연습을 해왔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이 꼭 틀렸다고도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연습을 잘한다고 실전에서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최대한' 상냥하게 통화를 마치고 쓰고 있던 헤드셋을 내팽개치듯 내려놓고서는 잠시 화장실로 향한다. 속이 약간 울렁거리는 걸 참고서 사과를 하느라 말라버린 입을 수돗물로 헹군다. 그녀는 눈을 감고 할머니를 떠올린다.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차라리 그 일을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낫지 않았을까. ‘됐어. 이미 다 지난 일인걸.’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다가도,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에게 폭언이나 욕설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 불쑥 못된 마음이 든다. '내가 그때 조금만 생각을 달리했다면, 너 같은 건 내일 당장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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