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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at Oct 06. 2024

[1화] 또, 같은 꿈


또 같은 꿈이다. 흡. 짧은 호흡과 함께 눈이 번쩍 뜨인다. 며칠 동안 비슷한 꿈이면 적응도 될만한데 왜 점점 잠들기 두려워지는 걸까. 다가오지 마. 속으로 크게 소리를 질러본들, 방 안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기만 하다. 그 순간 감정이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한 여자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지금은 오전 일곱 시입니다.” 아직 진정되지 않는 심장이 예상치 못한 소리에 자극을 받아 다시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누군가 지금 그녀를 본다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너 진짜 놀란 거 맞아?” 그 정도로 그녀의 표정은 침착하기만 하다. 놀랄수록 침착해지는 것. 그녀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이자, 가장 큰 단점이기도 하다.

 

그녀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침대 옆 암막 커튼을 살짝 걷는다. 온통 어두운 방 안에 빛이 스며든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들과 바쁘게 걷고 있는 사람들. 그녀가 일주일이 넘게 같은 꿈을 꾸든, 그로 인해 심장이 멎는다고 한들 세상은 별 탈 없이 잘 돌아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놀라도 티를 내지 않는다. 티를 난들 알아줄 사람도 없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심장은 다시금 원래의 박동으로 돌아온다. “출근이나 하자.” 말과는 달리 몇 초가 지나고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빠르게 출근 준비를 하고 그녀는 집을 나선다. 회사에서 먹을 점심을 사기 위해 집 앞 편의점에 들른다. 사실 그녀는 이곳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곳에 비해 점포의 크기가 작아 파는 물품의 종류가 적기도 하고, 사람들이 2~3명만 있어도 통로가 완전히 막혀버리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녀가 이곳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편의점 점주 때문이다.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친절은 기본일 텐데, 지금까지 1년 정도 이곳을 이용하면서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오늘도 똑같을 테지.’ 샌드위치 하나와 음료수 하나를 골라 카운터에 올려두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바코드를 찍는 점주의 모습이 흰자로 보인다. 그녀의 시선은 물건에만 꽂혀있고, 4~50대 정도 되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삼천오백 원입니다.” 순간 소름이 돋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재빨리 가방에 물건을 담고 나서 편의점 밖을 나선 후에야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쉰다.


그녀가 긴장한 이유는, 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방금 자신이 들었던 목소리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검은 물체, 움직이지 않는 다리, 숨이 막힐 듯한 공포와 긴장감, 중저음의 커다란 외침. 그녀는 방금 들은 목소리가 꿈에서 깨기 직전에 들린 커다란 고함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 동네에서 산 지 약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 누구보다 단골이었을 그녀를 대하면서도 그는 살갑게 인사를 건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손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그녀는 갑자기 속에서 화가 치민다. ‘이제 확 다른 편의점을 가버릴까’ 하지만 이내 그녀는 분노한 자신을 후회한다. 아마 할머니가 지금 자신을 보았다면 분명 한 마디 했을 것이다.





       

그녀의 할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그녀에게 입이 닳도록 말했다. “니는 성질을 좀 죽여야 한데이. 그 성질 못 죽이믄 진짜 잘못될 수도 있다꼬. 미안하다고 생각 들면 대충 사과하지 말고 제대로 좀 하고.” 할머니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녀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과 다툰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된 건 할머니 때문이기도 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할머니와 연관된, 할머니에서부터 비롯된 사람들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머니의 잘못이 정말 없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할머니의 손녀이기 때문에 화가 나거나 억울한 상황들도 분명히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녀가 화가 많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할머니 말처럼 화를 참지 못해,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한 적도 많았다. 한 번은 그녀가 ‘억울해서 화가 나는 걸 어떻게 참냐’고 대들기도 했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대뜸 무언가를 그녀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뒤로 주춤 물러나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거울이었다. 그 안엔 표정이 마구 일그러진 그녀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물었다. “니가 볼 땐 어떻노. 보기 좋아 보이나?”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할머니는 그대로 거울을 내려놓고 말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할머니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녀가 눈치챘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게 짜증 나면서도 한편으론 기분이 좋다.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나서 스마트폰을 켠 뒤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표정을 본다. 억지로 씩 웃어본 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자 잔뜩 올라간 어깨가 한결 내려간 게 보인다. 아까보다 감정이 차분해진 걸 느끼자, 다시 스마트폰을 가방에 넣은 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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