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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임금의 공간으로

- 근정전 둘러보기

by Twinkle

자, 드디어 경복궁 관람권을 사서 흥례문을 통해 경복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현재 경복궁 매표소가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 한쪽에 위치해 있어 흥례문을 마주한다는 것은 궁궐 안으로 들어왔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는데요. 요새는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서 수문장 교대식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공간에는 늘 관람객들로 북적입니다. 우리가 영국을 방문하면 왕실 근위병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시간을 맞춰 기다리기도 하고, 옆에서 사진도 찍고 하잖아요. 또 영국 왕실의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고요.


최근에는 내외국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수문장 교대식을 지켜보는데요. 조선시대의 왕이 살던 곳을 든든하게 지켰던 수문장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경복궁 산책의 색다른 묘미라고 할 수 있으니 시간 되시는 분들은 꼭 한 번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흥례문! 말 그대로 ‘예(禮)가 일어나서 널린 편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에 궁궐의 각 문이나 전각의 이름은 허투루 지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름의 의미만 제대로 알아도 좀 더 쉽게 궁궐에 대해 이해하실 수가 있죠.


조선은 유학이 매우 중시했던 사회였는데요. ‘예’는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고 사회를 아우르는 규범과 같은 존재였죠.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으면 궁궐에도 ‘예’라는 덕목을 넣었을까요.

흥례문(다시).jpg < 흥례문 현재 모습>


흥례문의 이름은 세종 때 처음 붙여졌는데 그땐 ‘홍례문(弘禮門)’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건륭제의 본명인 홍력(弘曆)을 피해서 ‘흥례’로 지었다고 전해지는데요. 왜냐고요? 아마 많이들 들어 보셨을 거예요. 예전에는 황제나 왕의 이름과 같은 한자를 쓰지 못하게 했었거든요. 황제나 왕은 신성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같은 한자의 이름을 쓰는 것을 피했던 겁니다. 또한 당시 중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했기에 혹시라도 이와 관련해서 트집을 잡을까 봐 우려해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요. 그렇게 흥례문은 새로운 이름으로 경복궁에 자리하게 됩니다.


영제교와 근정문.jpg <측면에서 본 영제교와 근정문>

흥례문을 지나 근정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로 앞에 다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리 밑을 보니 물이 흘렀을 것 같은 모습이기도 하고요. 이곳은 바로 금천교입니다. 조선시대 궁궐 입구 쪽에는 다리를 짓게 되는데요. 주로 금천교(禁川橋)라고 부르죠. 금천(禁川)의 ‘금(禁)’은 금지된 곳이라는 의미로 궁궐을 이야기할 때 많이 사용하는 글자인데요. 중국의 자금성 아시죠? 자금성(紫禁城)의 의미가 ‘자색의 금지된 성’ 이거든요. 이 점을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것 같네요.


각 궁궐의 금천교는 각각의 이름이 있는데요.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지만, 원래 다리 아래로는 물이 흘렀는데요. 그 물은 명당수의 의미로 금천(禁川)이라고 여겼죠.


우리 앞에서 경복궁은 풍수지리의 ‘배산임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명당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시대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경복궁 북쪽의 북악산에서 흐르는 물을 경복궁 안쪽으로 끌어와 흐르도록 하여 정기를 끌어오는 명당수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영제교는 역할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조선시대 신하가 되어 궁궐에 들어온다고 상상해 볼까요? 궁궐에 들어서 이 영제교 앞에 서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무래도 긴장도 되고 또 경건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그랬을 거예요. 영제교를 건너면 근정문, 그리고 근정전 이렇게 왕의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신성한 왕의 권역과 일반적인 권역을 나누는 역할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제교에 서서 양옆을 바라보니 재미있는 동물상이 보이네요? 네 마리의 돌로 만든 동물들이 눈에 띄는데요. 저만 신기했던 것은 아닌가 봅니다.


아주 오래전,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해던 ‘스펀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요. 그 방송에서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경복궁에 가면 메롱하는 동물이 있다’. 아니 신성한 경복궁에 메롱하는 동물이라니, 그런 게 정말 있을까 싶은데요. 그런데 바로 여기 있습니다.


영제교 서수 최종.jpg <TV에도 출연(?!)했던 영제교의 서수, 천록>

우리는 흔히 이것을 상서로운 동물이라는 의미로 서수(瑞獸)라고 말하는데요. 상상 속의 동물로 천록(天祿)이라고도 하죠. 옛날 사람들은 궁궐 안으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 상상 속의 동물이 영제교 밑으로 흐르는 물을 타고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다고 여겼다고 하네요. 멀리서 보면 무서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여움도 느껴지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해학과 재치도 함께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나쁜 기운이나 잡귀는 어떤 것이 막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이것이 막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잡상.jpg <서유기 등장인물로 만든 잡상>


바로 잡상인데요. 잡상은 격조가 높고 중요한 건물일수록 그 개수가 많습니다. 경복궁 내부의 전각에서 계속해서 보실 수가 있을 텐데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등이 조각되어 올려져 있는데요. 중국 자금성에 가서도 비슷한 잡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흥례문과 영제교 자리에 조선총독부가 있었거든요. 조선총독부가 만들어지면서 안타깝게도 흥례문과 영제교가 모두 헐렸고 다시 복원된 것은 2001년입니다. 조선총독부는 광복 이후에 ‘중앙청’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청사로 사용하기도 했었고, 1986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요.


아마도 기억하는 분들이 꽤 있을 것 같아요.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하여 김영삼 정부가 ‘역사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죠. 당시 국내외에서도 사료적인 가치 때문에 철거에 대한 찬반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철거하기로 결정되죠. 옛 조선총독부의 중앙돔 상단 첨탑은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가면 보실 수 있는데요. 서울대학교 최말린 교수라는 분이 독립기념관 서쪽에 흔적, 폐허, 무덤이라는 콘셉트로 석조물들을 모아서 우리 방식으로 기억을 재현했다고 합니다. 서쪽은 우리가 생각했을 때 동쪽과는 다르게 해가 지는 곳, 마무리, 쓸쓸함을 나타내잖아요? 일본 제국주의가 끝났음을 공간적으로 재현하고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이 이야기하죠.


자, 이런 역사의 흔적을 뒤로하고 이제는 근정문으로 걸어가 보시죠. 근정문은 근정전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문인데요. 여기서는 꼭 뒤돌아서 앞을 봐줘야 합니다, 자, 함께 걸어온 길을 돌아볼까요?


우리 앞으로 광화문과 흥례문도 보이고, 무엇보다도 큰길 3개가 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삼도(三道)라고 하는데요. 길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있습니다. 가운데 가장 크고 넓은 길이 바로 왕이 다니는 길이고, 양옆의 길은 신하들이 이용하게 되는 거죠. 왕이 다니는 길은 ‘어도(御道)’라고 하는데 아무나 함부로 이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왕의 전용길이니까요. 함부로 이용했을 경우에는 곤장을 맞는 처벌이 내려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죠.


근정문과 삼도.jpg <근정문과 삼도의 모습>


여기서 궁궐을 둘러볼 때 알면 좋은 상식을 하나 더 알려드릴게요! 궁궐에서는 동서남북이 중요합니다. 방향에 따라서 의미하는 것들이 조금씩 달라지거든요. 왕은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동서남북 중 어디를 바라봤을까요? 바로 남쪽입니다. 우리는 왕이 ‘남면(南面)’한다고 표현하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경복궁에 들어와서 광화문쪽을 바라보는 게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 되죠. 우리는 지금 왕의 시선으로 광화문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되면 근정문에서도 가운데 가장 큰 문은 왕을 위한 전용문이고, 양옆의 문은 신하들을 위한 문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는데요. 남면을 기준으로 왼쪽이 동쪽으로 주로 문반이, 오른쪽이 서쪽으로 무반이 이용하는 쪽이 됩니다. 그래서 근정문 옆에 보이는 일화문(日華門)은 문반이, 월화문(月華門)은 무반이 주로 이용하게 되는 거죠.


여기서 우리가 알고 가면 좋은 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신분제입니다. ‘양반’에 관한 건데요. 우리는 조선을 ‘양반사회’다 이런 이야기들 하잖아요? 양반은 문신과 무신을 합쳐 지칭하는 말인데요. 무신은 문반과 문관, 동반 등으로 불렸고, 무신은 무반이나 무관, 서반으로 불렸죠. 신하들은 자신이 문신이라면 문신이 이용하는 길을, 또 무신이라면 무신이 이용하는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시선을 근정문 바로 앞으로 돌려볼까요? 근정문 국왕 전용 문 계단 한가운데, 돌 위에 조각이 새겨져 있네요. 이것은 바로 ‘답도(踏道)’라고 하는데요. 한자 뜻을 풀이하면 ‘밟는 길’이라는 의미죠. 여기서 저는 답도를 마주할 때 관람객분들께 묻곤 합니다. 왕이 이 답도를 어떻게 지나갔을 것 같냐고 말이죠. 옆에 계단도 있어서 계단을 이용했을 것이다, 가마에서 내려서 뛰어 올라갔을 것이다 등등 다양한 답변이 나옵니다. 그런데요. 왕은 가마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답도를 실제로 밟을 일은 없었습니다. 계단은 가마를 멘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이었고, 왕은 가마에 앉은 채로 답도 위를 지나가는 건데, 상징적으로 길을 밟았다고 하는 거고요.


안쪽도 살펴봐야겠죠? 근정문 답도에 새겨진 것은 공작, 근정전 답도에 새겨진 것은 봉황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봉황은 상상 속의 새로 아주 오래전 중국 고대에서부터 길조로 여겨진 신성한 존재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봉황이 나타나면 태평성대의 시기라고 믿었다고 하여 이렇게 왕이 통치하는 공간에 이렇게 봉황을 만들어 넣게 된 거죠. 참고로 황제의 공간에는 ‘용’이 조각되어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근정문 답도 전체.jpg <근정문의 답도>


이렇게 우리는 근정문 앞에서 왕의 시선으로 여러 가지 것들을 바라봤는데요. 이제는 근엄하고 격식 있는 왕의 통치공간인 근정전으로 향할까 합니다. 심호흡 한 번 하고, 옷매무새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들어가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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