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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아빠 Oct 04. 2022

금강내산전도 (정선)

한 번이라도 진전하는 중이라면 그것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 - 정선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산을 만드는 일로 비유하자면, 한번 담아 올릴 흙이 부족하여 완성하지 못했다고 하여도 내가 그만둔 것이다. 구덩이를 매워 평지를 만드는 일에 비유하자면, 비록 한 번의 흙이라도 부어서 진전하는 중이라면 그것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 

(자한편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비여위산 미성일궤 지 오지야 비여평지 수복일궤 진 오왕야)


 그 누구도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파급력을 가져올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또한 자신이 도전하는 일이 언제 최고점에 오를지 정확히 알기도 어렵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없는 한 정확한 예측은 모두 불가능합니다. 다만 경험과 통계를 기반으로 예상과 직감을 믿고 나아갈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미래는 막막하고 두렵습니다. 아이들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매달립니다. 대학을 들어가면 다 끝날 것 같지만 다시 좋은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또 실적을 쌓아 승진을 해야 하고, 중년이 되면 노후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고, 노년에는 자녀를 걱정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에 따라 주어지는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입니다. 죽기 전까지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올바른 가치관과 신념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나 흔들릴 때, 정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 바른 길을 인도해 주길 원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바람이 간절해지면 성공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에게 조언을 요청하거나 멘토가 되어 달라고 사정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자신의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서 모든 걸 전부 알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멘토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 안에서 그저 다른 사람의 길을 유추할 뿐입니다. 


 간혹 성공이라는 타이틀을 쥔 사람들은 마냥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일 거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공은 모든 고민과 걱정을 사라지게 하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최고의 권력자라도, 그 어느 높은 자리에 있든지 그들도 결국은 보통 사람들처럼 처한 상황에 대한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들일뿐입니다. 자신의 길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격려나 조언의 수준에서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어떤 존재라도 의지하면 할수록 자신은 약해집니다. 자신의 길을 당당히 가기 위해서는 바른 길을 선택하고 자신을 믿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들이박고 쓰러지더라도 지치지 않고 일어서는 과정을 되풀이하면 할수록 사람은 강해집니다. 그게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제대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길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단어는 정선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든 일등 공신입니다. 진경산수화란 우리의 자연을 소재로 그린 그림을 말합니다. 정선이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진경(眞景)이라는 말은 실제의 경치라는 뜻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서화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吳世昌) 과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고희동(高羲東) 등이 일제강점기에 정선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면서 진경이라는 단어에 민족적이고 자주적인 의미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근대 화가들에게 실제의 경치를 그리는 모범적 화가로 정선을 인식시켰고, 그의 명성은 급격하게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진경산수화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실경산수화와 차별된 용어로 부각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실제 경치에 화가의 자아와 풍경의 감흥이 녹아들어 예술성이 높아진 그림을 진경산수화로 분류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산수화는 주로 중국의 명소나 옛이야기에 나온 곳을 상상이나 관념으로 그리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정선의 화풍을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서양의 악기들이 유행하는 시대에 우리나라 전통 악기의 가치를 보존하고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국악인들과 비슷한 입장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금강산(金剛山)은 지역으로 구분하여 서쪽을 내산, 동쪽을 외산으로 나눕니다. 내산은 내금강, 외산은 외금강이라고도 합니다. 정선은 여러 번 금강산에 다녀왔고, 현존하는 금강내산의 작품만 9개나 됩니다. 모두 넓은 경관을 압축하여 화면에 담았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구조입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금강산을 한 바퀴 둘러보면서 그린 것처럼 산 곳곳의 명소가 모두 담겨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는 조선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베버 신부가 소장하던 《겸재정선화첩》에 들어 있는 그림입니다. 베버 신부는 독일 사람으로 로마 가톨릭 소속의 수도회인 성 베네딕도회 신부였습니다. 그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에 걸쳐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을 방문하였습니다. 신부는 조선에 대한 관심이 많아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고국에 돌아가서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Im Lande der Morgenstille)》라는 책까지 발간했습니다. 그가 가져갔던 것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겸재의 화첩입니다. 이 화첩은 독일의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다가 2005년 영구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지금은 한국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 화첩》에는 정선의 노력이 스며든 21점의 그림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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