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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아빠 Oct 10. 2022

답설방우 (최북)

즐겁지 아니한가?

답설방우(踏雪訪友) - 최북 (출처 : 공우마당 CC BY)


배우고 때에 맞추어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먼 곳에서 찾아오는 벗이 있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움이 없으니 또한 군자라고 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학이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위 고백은 《논어》의 첫 문장으로 유명합니다. 책의 첫머리에 나오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논어》를 손에 쥐어 본 경험이 있다면 읽어봤을 확률이 높습니다. 논어를 편집한 사람들은 왜 이 구절을 가장 앞에 배치했을까요? 그것은 책의 첫 구절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첫 내용이 중요합니다. 지금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목차가 없던 과거에 첫 내용은 본문의 이정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동양 고전의 시작 부분에는 책의 분위기와 주제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기도 합니다.


 《논어》를 포함하여 흔히 유학의 4대 경전이라고 알려진 《대학(大學)》, 《중용(中庸)》, 《맹자(孟子)》 같은 책들도 첫 구절은 모두 편집자의 의도가 실린 묵직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대학》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학의 도(道)는 사람이 가진 맑은 본성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들이 친밀하게 살도록 하며, 지극히 선함에 머무르게 하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

《중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이 사람에게  명을 가리켜 본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 일컬으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지위도 수도지위교)

《맹자》는 양혜왕을 만난 맹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위나라의 제후였던 양혜왕은 당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맹자가 방문하자 자신의 나라에 어떤 이로움을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다음과 같이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하필 이로움만 말하십니까? 오직 인(仁)과 의(義)가 있을 뿐입니다.”(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하필왈리 역유인의이이의)


 《논어》의 첫 구절은 3가지 즐거움을 담고 있습니다. 배움의 즐거움, 벗을 만나는 즐거움, 명성에 초연함이 그것입니다. 배움의 중요성과 뜻을 같이 하는 벗에 대한 이야기는 《논어》에 반복해서 등장하여 여러 번 소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명성에 관한 공자의 입장을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얘기하였습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그럼에도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들을 탓하지 않는단다. 나는 밑바닥에서부터 배우기 시작해 통달하게 되었단다. 오직 하늘만이 나를 알 것이다.”(莫我知也夫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막아지야부 불원천 불우인 하학이상달 지아자기천호) 이 말도 어떠한 계기로 쓰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위기로 보면, 중국 전역을 돌아다닐 때 자신이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한탄으로도 생각할 수 있고,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의 소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무엇이든 이 말에는 하나의 가르침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야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사람의 자아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연의 한 개체로 태어난 삶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미를 만들어 쌓아야 특별함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논어》의 첫 문장은 이왕 가야 할 길이라면 건전한 즐거움으로 채워서 가는 게 좋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논어》의 편집자는 후학들에게 반드시 숙고해야 할 내용으로 위의 구절을 첫 문장으로 고른 게 분명합니다. 그만큼 《논어》 전체를 대표하는 말로 삼아도 부족함이 없다고 합의한 셈입니다.


 노년의 독백 같은 첫 구절은 얼핏 보면 너무 평범한 말처럼 보입니다. 《논어》에 대한 기대가 컸던 사람은 실망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논어》가 정말 오래되고 유명한 고전이어서 한번 보면 번개를 맞은 듯이 순식간에 현명한 사람으로 바뀌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학문과 성장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영어 단어를 하나 외울 때도 최소 서너 번 이상 들여다봐야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논어》는 곁에 두고 수시로 봐야 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서서히 곱씹어 봐야 그 진 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자극적인 맛을 배제하고 인공적인 조미료를 빼서 재료의 순수한 맛으로 승부하는 음식과 비슷합니다.


 어쩌면 노년의 공자는 현실에서 소박하고 진실된 일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이 나아가고 있는 바른 길에 대한 믿음과 그에 대한 만족이 삶의 전부라고 얘기하는 듯 들립니다. 안타깝게도 이 문장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공자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노년에도 목숨을 건 도전을 감행했고, 늘 말보다 실천을 강조했던 삶의 자세를 알아야 비로소 그 향기를 제대로 맡게 됩니다.




 〈답설방우(踏雪訪友)〉 눈을 밟으며 친구를 찾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림 속 세상은 하얗게 덮여서 발이 눈에 푹푹 빠지고,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나고, 손과 발이 꽁꽁 얼어버릴 듯한 기세입니다. 그러나 날씨에 개의치 않고 나귀를 탄 인물은 친구를 찾아 나섰습니다. 친구는 눈을 뚫고 찾아오는 벗을 마루에 앉아 기다립니다. 집 밖을 수시로 내다보며 벗이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그림의 선은 거칠고 마른 느낌인데, 그림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고 안개가 떠돌아다닙니다. 물의 기운이 가득한 그림의 분위기와 상반된 표현 기법이 흥미롭습니다. 구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과 나무가 그윽한 멋을 풍기고, 하단의 다섯 사람은 관람자에게 이야기를 선물합니다. 이야기는 보는 사람의 상상력에 따라서 다양한 보따리로 장식됩니다. 


 〈답설방우〉는 언제라도 찾아갈 벗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최북의 작은 바람이 담긴 그림 같기도 합니다. 담뿍 쌓인 눈은 최북이 술을 마시고 얼어 죽었다는 날을 연상시킵니다. 만약 그에게 언제라도 반갑게 맞아줄 친구가 있었다면 밖에서 얼어 죽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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