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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디자이너 Mar 28. 2021

아버지의 밍크 이불

상처 여섯.




  “현이야, 남잔 말이여. 다 도둑놈이여. 알았제?”


  7살인 나를 품에 안고 아버지가 하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평일에는 새벽 5시면 나가 집을 짓는 목수 일을 했고, 일이 없는 주말에는 늦잠을 잤다. 그에게 가려하면 엄마는 한사코 말리며 떠들지도, 안방 근처도 못 가게 했다. 나는 집안일하는 엄마 눈치를 살피다가 그가 있는 안방으로 살그머니 들어갔다.


  방안은 아침볕이 커튼에 가려져 어둑했다. 아버지는 복슬복슬한 꽃송이가 그려진 붉은색 밍크 이불을 덮고 있었다. 방 입구에서부터 살금살금 기어가니 이불 아래쪽으로 나온 그의 발가락이 보였다. 이불을 들쳐 들어가려는 순간, 이불이 나를 쭉 빨아 당기면서 아버지 품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자는척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잡아당겨 올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당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껄껄 웃었다. 처음에는 갑갑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지만, 가만히 숨을 고르니 아버지의 살 냄새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우리 예쁜 셋째 딸내미 왔어요~. 현이야, 니는 다른 남자한테 이렇게 안기면 안 된다. 세상 남자는 아빠 빼고는 다 도둑놈 인기라. 나한테만 이렇게 안기는 기다. 약속할 수 있제?”


  아버지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억지 약속을 받아냈다. 그는 다른 자식들에게는 엄격하고 무뚝뚝했지만 나에게만큼은 밍크 이불처럼 부드러웠다. 태양을 끌어안은 것처럼 뜨거운 아버지의 품과 나의 체온, 온돌방 바닥 열기, 그리고 이불속 온기까지 더해 따뜻했다.


  잠시 뒤 엄마는 방문을 살그머니 열더니 방안을 살폈다. 아버지는 나를 밀착해 끌어안으며 자는 척했고, 엄마는 내가 이불속에 있는 걸 보고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 뒤로도 아버지가 늦잠을 자는 날이면 이불속 그의 품에서 잠이 들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아빠 빼고 남자는 모두 도둑놈 인기라.'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다.      


  초등학교 4학년쯤,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는 그의 일이 바빠져서 밤늦게 들어와 새벽같이 나갔다고 둘러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동네에 돌았다. 엄마는 아버지를 어떻게든 데리고 올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나섰지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초점 없는 눈으로 돌아와서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날 밤 집안은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다음날, 엄마는 친척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바람난 아버지의 얘기를 시작했다.


  "아파트 현관으로 현이 아빠가 앞장서 나오고 배부른 젊은 년이 뒤따라 나오더라고요. 글쎄 둘이서 손을 꼭 잡고 있다가 현이 아빠가 차를 타자, 그년이 손을 흔들더라고요."


  엄마는 임신한 여자의 모습을 보고 충격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없는 안방에는 밤낮으로 밍크 이불이 덩그러니 깔려있었다. 엄마는 집에도 오지 않는 그의 밥부터 퍼서 식지 않게 매일같이 이불 안에 넣어 두었다. 나는 그 이불로 동굴 모양을 만들어 기어들어 가보기도 하고 베개를 이불 안에 넣어 놓기도 했다. 그러면 마치 그가 안에서 자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불 아래를 들춰 기어들어가 얼굴을 이불속 깊이 파묻어 보지만 이제 아버지의 냄새도 온기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했던 말이 되뇌어지며 눈물이 차오르고 양쪽 볼을 타고 귓가에 흘렀다. '아버지 말은 거짓말이었어.’    

 

  아버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고, 엄마는 홀로 4남매를 키웠다. 자식 버리고 떠난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하는 것처럼. '아빠 빼고는 남잔 모두 도둑놈이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 귓가에 울렸다.


  그럴 때면 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을 틀었다. 이어폰 소리를 높여 양쪽 귀를 틀어막고 흘러나오는 전자기타 소리와 내지르는 고성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아야 아버지 생각이 잦아들었다. 드럼 소리에 심장까지 꽝꽝 울려대기 시작하면 마음속 믹서기를 작동시켰다. 그 안에 아버지와의 추억들과 내 눈물을 넣어 음악소리와 함께 갈아버렸다. 지울 수 없으니 차라리 섞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쾅! 앙! 쾅! 앙! 쾅! 앙!’


  비로소 아버지의 형태는 내 기억 속에서라도 변형되고 왜곡되었다. 고등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이어폰 볼륨을 높이는 것 밖에 없었다. 






배재현, 나는 가끔 엄마가 미워진다, 갈매나무, 2021


분노의 감정 이면에 숨은 것들

모든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해결되지 못하고 억압되어 있을 때 이면에 있을 법한 대표적인 감정 중 하나가 강렬한 분노입니다. 분노가 자주 폭발하는 부모라면 아마도 그들의 어린 시절 화를 잘 표현하거나 적절하게 참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부모를 보며 자란 자녀는 닮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하며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최대한 부정하려 애쓰곤 합니다. 불편한 감정을 가능한 부인하고 최소화하려는 것입니다. 또는 이런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여 그들을 탓하고 비난하며 자신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p.153


무엇을 느낄지 선택할 수는 없지만

이 무엇을 느낄지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내 감정에 어떻게 반응하고 표현할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감정은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나만의 알람 장치와도 같습니다. 이것을 통해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감정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셋째, 감정은 일시적일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감정을 통제하는데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게 됩니다. p.8


들여다보기

이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감정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해결하려고 한다.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지 않으려고 하거나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쓴다.

-화, 불안, 서운함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긴다.

-화가 나거나 부정적 감정을 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표현해서 편해진 경험이 거의 없다.

-눈물을 보이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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