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u Ming Jun 19. 2024

우리의 소원, 자기, 밥 먹기, 숨쉬기

 호구여도 괜찮아 #22 : 하악골융기 (골)


골 (骨), 살기 위해 뼈를 갈아 넣었다.


우리는 Q사의 핵심 기술 검증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마치 산을 오르다 칠부 능선을 넘은 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정상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희망이 우리를 감쌌다. 성공적인 핵심 기술 검증으로 이미 진입 장벽을 넘어선 우리는 비록 제품 검증과 양산 검증이 남아 있었지만, 우리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약 반년 내에 모든 과정을 완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우리의 첫 번째 제품은, 우리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역대 최악의 성능을 보이며 결국 폐기되는 수순을 밟아야 했다. 형편없는 첫 번째 제품으로는 세계 최고품질을 지향하는 Q사의 검증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벤더 진입에서 탈락할 위기에 직면해야 했다.


우리는 사이래 역대 최악의 첫 번째 제품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면서도 수백 명에게 둘러싸여 비난받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반년을 버텨야 했다. 최종적으로, 우리 회사는 최종 Q사의 벤더로 등록되었지만, 이는 에밀레종의 전설과 같이 우리의 살과 뼈를 갈아 넣은 결과물이었다. 다시돌아가고 싶지 않은 2019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그 해 가을 이야기를 기고 싶다.




⑤ Q사의 제품 검증


2019년 가을, Alpha 팀의 구성원 30명은 모두 중국 출장 중이었다. 우리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며, 매일 백 명 이상의 고객과 수십 차례의 회의를 진행해야 했다. 출장을 온 지 두 달이 되었지만, 숙소에서 잠을 잔 기억이 거의 없었다. 군 복무 24개월 동안 22번의 훈련에 참가했고 방독면을 쓰고 잔 적도 있지만, 군대에서도 이런 종류의 고생은 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 팀원들은 마치 전쟁 속에서 고문받는 포로처럼 이틀에서 삼일씩 잠을 못 잤다. 대부분 눈이 풀려 있었고, 도저히 못 버티고 냄새나는 벤더룸 바닥에 쓰러져 자기도 했으며, 어제 일과 오늘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우리는 도저히 버티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체력적, 정신적 한계에 다다랐다. 회의실로 걸어가다가 계단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맥없이 넘어졌고, 고객과 회의 중 뜬금없이 고객에게 소리를 질렀으며, 클린룸에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아 찾으러 가보면 코딩을 하다가 구석 어딘가에 쪼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더 이상 억지로 밀어붙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대로는 일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심지어는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갑자기 시작할 수 있는 '퇴사'의 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멈춰야 했다.


고객은 미국, 캐나다, 일본, 인도, 중국, 대만, 한국, 필리핀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우리는 온종일 매일 다른 팀과 다양한 주제로 회의를 진행했다. 프로젝트 일정부터 기술적 문제 해결까지 매일 밤늦게까지 논의를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고객은 당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공격을 하거나 물고 늘어졌다. 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량과 스트레스였다.


숨쉬기, 자기, 밥 먹기, 이 세 가지가 우리의 꿈이었다.


두세 달간의 강행군이 지속되었지만, 나 스스로 힘든 것은 어떻게든 묵묵히 참아보려 했다. 그러나 신사업의 성공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이미 한계를 오래전에 넘어선 동료들에게 납득이 될만한 대책 없이, 그저 목표를 위해 강행군을 지속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그저 억지를 부리고 생떼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팀장님께 절박하게 말했다.


"팀장님, 끼니를 두 달 동안 중국 빵으로 때웠던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잠은 제대로 자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도 잠은 잤어요. 이제 두 달째인데, 모두의 상태를 보세요. 제정신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하는 것은 업무가 아니라 고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도 기본적인 의식주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업무 때문이라 해도, 백 명이 넘는 사람에게 매일같이 비난을 받고 시달리는 것은 보통의 정신력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눈치 보지 않고 숨 쉬고 싶었고, 몇 시간이라도 마음 편히 자고 싶었으며, 맛있는 건 아니더라도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싶었다. 회사 일을 하면서 사람의 기본권이 이렇게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수백 개의 액션 아이템을 관리했고,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을 만났으며, 수십 개의 메신저 방에서 하나하나 대답해야 했다. 그동안 일을 많이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때 나의 머리와 능력에 한계 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본사의 지원을 얻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권모술수 부장이 우리를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항복을 받아내려는 흑막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도저히 못 버티겠습니다, 포기할 테니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애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기'라는 단어를 명분 삼아 신사업의 성과를 통째로 가져가려는 음흉한 속셈이었다. 분명히 먹고살만한 시대가 되었는데도, 마치 전쟁터처럼 남의 것을 무리해서 빼앗으려 했다.


'사면초가'가 따로 없었다. 앞을 보면 화가 잔뜩 난 고객이 씩씩대고 있었고, 뒤를 보면 권 부장이 짐을 내려놓고 포기하면 이제 편해질 것이라 회유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비난과 질책 속에서 팀원들은 점점 지쳐갔고, 나 역시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자신의 것은 뺏기지 않고, 남의 것은 뺏으려 하는 타짜의 아귀, 김윤석 배우님 펜이에요!


권 부장은 타고난 정치 감각을 가진 기회주의자였다. 우리는 그의 횡포에 맞서 싸우고 싶었지만, 우리의 첫 번째 제품은 너무나도 고물이었고, 검증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수개월은 더 버텨야 했다. 따라서 업무를 도울 수 있는 중국 엔지니어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중국 엔지니어의 지원을 무기로 삼아, 우리 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회가 있을 때 우리에게 목줄을  두려고 했다. 그러나 다 큰 성인들이 해외 출장을 나와서, 심지어 남의 회사 안에서 들다며 울었고, 모두 당장이라도 퇴사를 할  같은 표정이었다.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팀장님은 정치적인 타협이 필요하다고 결하셨다. 비록 권 부장은 도와주겠다는 명목으로 야금야금 무엇인가를 자꾸 요구했고, 우리는 성과를 조금씩 나눠줘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요청한 대로 권 부장이 중국 엔지니어 몇 명을 추가 배정했을 때, 순식간에 숨통이 트였고, 적어도 우리는 전쟁 포로와 같은 처지는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추가 배정된 몇 명의 중국 엔지니어 덕분에 클린룸에 들어가는 빈도를 줄일 수 있었고, 적어도 몇 시간의 휴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겨우 숨통을 트였다고 해도 숙소에 자정이 넘은 시간에 들어가서 잘 수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주말 근무는 기본이었고, 추석을 포함해서 고객이 모두 쉬는 중국 국경절도 출근했다. 엔지니어들은 힘들었지만 적어도 매일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에는 잠들 수 있었다. 그러나 팀장님과 나는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고 새벽 3시에 다시 고객에게 불려 가는 악순환을 피할 수 없었다. 도대체 사람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회의감 속에서 어떻게든 버티자는 생각뿐이었다.


팀장님은 전쟁 중 군인처럼 본사에게 식량 원조를 요청하셨다. 권 부장 팀은 숙소에 추가로 방을 하나 잡고, 그 안에 '삼분 요리, 컵라면, 햇반'을 배달했다. 회사에서 시킨 일을 하면서도 개인 돈으로 인심을 쓰는 척, "저녁 늦게 들어오시더라도 따뜻한 삼분 요리 하나는 드시고 주무세요." 혹은 "삼분요리 입고 되었습니다."라는 공지로 인심을 사고자 했고, 한발 더 나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싶어 했다.


경영진에게 "사장님, 삼분요리를 나르느라 정신이 없습니"라고 몇 번의 보고를 한 후, 약발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삼분요리는 은근슬쩍 참치캔으로 바뀌어 있었다.


후안무치, 철면피한도 정도가 있을 것인데 그 뻔뻔함에는 한계가 없었다. 나는 얼마나 얄밉고 화가 났는지, 굶어 죽더라도 삼분 요리에 내 자존심을 팔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던 동료들에게 이 또한 소중한 식량 활력소가 다. 비록 제대로 된 첫 끼니로 자정을 넘긴 시간에 삼분요리와 햇반을 먹었지만 동료들어떻게든 어려운 시간을 버텨냈다.


나는 그 어려운 시간을 묵묵히 버텨준 동료들에게 매우 고맙다. 또한 온전히 빛을 발하고 오랜 시간 보상받았어야 할, 그들의 노력과 성과를 지켜내지 못해 깊이 미안하다.




하루는 영어 소통이 잘 되지 않던 나이가 지긋한 일본 엔지니어가 벤더룸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평소 작은 화이트보드를 목에 걸고 우리 엔지니어들과 회의하던 그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내가 바쁘더라도 모든 회의에 참석해 진행 상황을 체크하곤 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고객은 나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Come here!"라고 외쳤다.


씩씩대는 소리와 함께 얼굴이 붉어진 그는 나를 문 앞에 세워둔 채, 20분이 넘게 일본어로 크게 소리치며 얼굴을 맞대고 욕을 했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일본어가 이렇게 무서운 언어였던가 생각이 들 무렵, 그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문을 몇 번 차더니 벤더룸을 나갔다. 나는 수치심이나 억울함보다 오죽하면 저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회사의 첫 번째 제품은 지독히도 형편없는 고물이었다. 결국, 우리는 역사상 최악이었던 첫 번째 제품을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개선된 새로운 제품을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고객에게 보고했다. 비록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지금과 같은 생활을 더 참아 내야 했지만, 적어도 우리는 버티면 이기는 판세를 만들어 냈다.




우리는 쓰러질 것 같은 상황에서, 삼분요리로 끼니를 때우더라도 어떻게든 몇 개월을 더 버텨냈다. 그리고 개선된 새로운 제품이 입고된 지도 벌써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 개선된 새로운 제품은 첫 번째 제품과 비교하여 훨씬 개선된 결과물을 보여줬다. 우리는 두 번째 제품으로 겨우 제품 검증을 요청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을 갖추었고, 고객에게 이를 증명하기 위해 새벽까지 논가 계속되었다.


11월의 토요일 자정을 지나가고 있을 무렵, 우리는 Q사 기술팀의 제품 검증 결과를 듣기 위해 콘퍼런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지만, 긴장과 압박감에 콘퍼런스에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고 말았다. 나는 군대에서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나는 하수구에 들어갈 때도 혼자 웃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압박감에 구토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회의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그동안의 고생과 노력이 결실을 맺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우리 모두를 짓누르고 있었다. Q사의 엔지니어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


"We just found out that your company got validation approval!"

나는 믿기지 않아 주 팀장님을 다시 쳐다보았다. 주 팀장님은 나에게 작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산의 9부 능선을 넘고 있다고 느꼈고, 하지 말아야 할 기대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더 고생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양산 검증은 이전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고 우리를 지치게 했다.




돌이켜보면, 문제는 까다로운 Q사도 꿍꿍이로 가득 찬 권 부장도 아니었다. 문제는 우리 알파팀이 만들어낸 제품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알파팀의 첫 번째 멤버였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전 21화 '쉬운 포기'가 아닌 '어려운 성공'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