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해당48영 꽃 이야기 (2) - 배롱나무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이 현재의 서울 서촌 지역에 비해당을 짓고 지은 ‘비해당 48영’*은 조선시대 초기 서울 일원에서 정원을 가꾸는데 쓰인 꽃이며 나무를 알려주고 있다. 나는 48영 가운데 ‘금전화金錢花’는 금불초(Inula britannica)일 것이라고 검토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비해당 48영의 제목을 살펴보면서 쉽사리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숙제가 있었다. 제목에 “눈 속의 동백 (雪中冬白)”과 “반 즈음 핀 산다 (半開山茶)”가 있었고, “만발한 자미 (爛熳紫薇)”와 “백일홍 (百日紅)”이 있는 것이었다. 나는 동백과 산다는 동백나무(Camelia japonica)를 뜻하고, 자미와 백일홍도 모두 배롱나무(Lagerstroemia indica)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48영의 다른 식물들과 달리 이 2종에 대해서는 두 편의 시를 읊었단 말인가? 아니면 모두 서로 다른 꽃나무인가?
동백나무 종류 중에는 일본 원산의 애기동백(Camelia sasanqua)이 있다. 이 애기동백을 산다화山茶花라고 하고 초겨울에 꽃이 핀다. 그러므로 “눈 속의 동백 (雪中冬白)”은 동백꽃을, “반 즈음 핀 산다 (半開山茶)”는 애기동백을 읊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미와 백일홍에 이르러서는 정말로 같은 꽃을 읊었는지, 다른 꽃을 읊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成三問(1418~1456)이 지은 자미와 백일홍 시를 감상해보자.
만발한 자미화 (爛熳紫薇)
歲歲絲綸閣 해마다 조정에서
抽毫對紫薇 붓 들고 자미紫薇를 마주했지
今來花下飮 꽃 그늘 아래서 지금 술을 마시니
到處似相隨 곳곳마다 서로 따르는 것 같아라
백일홍 (百日紅)
昨夕一花衰 어제 저녁에 꽃 하나 지더니
今朝一花開 오늘 아침엔 꽃 하나 피었네
相看一百日 백 일 동안 감상할 수 있으니
對爾好銜杯 너와 함께 술잔 들기 좋구나.
이 시를 읽어봐도 자미와 백일홍이 같은 꽃인지, 다른 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메리카 원산 백일홍은 15세기 중엽에 우리나라에 있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므로 자미와 백일홍 모두 배롱나무일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이제 비해당48영의 자미와 백일홍이 과연 어떤 꽃인지를 검토하면서, 내 마음속 숙제를 털어버리기로 한다.
현재 우리가 백일홍(Zinnia elegans)으로 부르는 화초는 멕시코 원산의 1년초이다. 일본에서 간행된 <원색원예식물도감>에 따르면, 1796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유럽에 도입되었고, 일본에는1862년 경에 도입되었는데 백일초百日草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원색원예식물도보>에 따르면, 대정(大正) 연간에 일본에 도입되었다고 한다.**** 대정 연간은 1912~1926년이니 도입시기가 더 늦어진다. 이러한 일본에서 백일홍의 도입시기로 보아 우리나라에도 19세기 후반에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중국을 통해 더 일찍 도입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더 검토할 문제이다.) 아무튼 <조선식물향명집>에서 멕시코 원산의 Zinnia elegans가 한자명 ‘百日草’와 함께 한글명 ‘백일홍’으로 수록되었고, 문일평의 <화하만필>에서도 백일홍은 널리 퍼저 어느 사람의 정원에서든지 이 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여, 이미 1930년대에는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초본 백일홍이 도입되기 전, '백일홍百日紅'은 안평대군과 동시대 인물인 강희안姜希顔(1417~1465)의 <양화소록>에서 자미화紫薇花의 속명으로 쓰인 이래 조선 말엽까지도 줄곧 배롱나무를 지칭했다. <산림경제>에서 “자미紫薇, 백일홍百日紅이다.”라고 했고, <물명고>에서도 자미紫薇에 대해 한글로 “백일홍”이라고 설명하고 백일홍百日紅과 같다고 했으며, 황필수黃泌秀(1842~1914)가 1870년 펴낸 <명물기략>에서도 자미紫薇를 뜻하는 한글명으로 ‘백일홍’이 쓰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19세기 까지의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서 백일홍은 거의 배롱나무임에 틀림없다.
<중국식물지>에서도 자미紫薇(Lagerstroemia indica)의 속명으로 백일홍이 나오고,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에서도 백일홍(Lagerstroemia indica)의 다른 이름으로 자미가 나온다. 백일홍이 배롱나무가 아니라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자미紫薇가 배롱나무가 아니라 자주색 장미일 가능성을 살펴보아도, 48영에는 이미 “시렁 가득한 장미 (滿架薔薇)”와 “사계화四季花”를 읊은 시가 있으니, 별도로 자주색 장미를 읊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므로 자미와 백일홍이 모두 배롱나무를 뜻한다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같은 꽃나무를 다른 이름으로 읊었을까? 그 실마리는 안평대군과 동시대를 산 강희안姜希顔(1418~1465)의 <양화소록>에서 엿볼 수 있다. 강희안은 “자미화紫薇花” 글 제목 줄에 “속명俗名 백일홍百日紅”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는 것이다. “산다화山茶花”에도 “속명俗名 동백冬栢”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는데, 노송과 만년송, 오반죽, 국화, 매화, 난혜, 서향화 등 다른 글의 제목에는 속명을 수록하지 않고 있다. 공교롭게도 <양화소록>에 속명이 수록된 2종의 꽃나무에 대해서만 48영에서 2수씩 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지은 “48영 발跋”이라는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48영은 48개의 사물事物이다. 한 영詠이 각기 한 사물을 가지기 때문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시詩를 배움으로써 살필 수 있으며, 풀과 나무, 새와 짐승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고 했다. 48영이 정말 그렇다. 풀과 나무, 새와 짐승의 생生과 성性은 멀고 가깝고 맑고 흐림이 있어서 같지 않다. 고금의 인물도 각각 귀천과 좋고 나쁨의 다름이 있다. 그러므로 득실에 따라 그 가운데 의심할 만 한 자를 살필 수 있다. 신하의 마음에 의혹이 있는데도 침묵하고 발설하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을 섬기는데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자미와 백일홍, 산다와 동백은 한가지 꽃의 두 이름으로, 옛날 이름과 민간에서 부르는 이름이 다른 것이다. 지금 나누어져서 4영이 되었지만 어찌 별종이 있겠는가? 단지 처음 제목을 정한 사람이 짝으로 대구對句를 만드는데 익숙하여 산다와 해당을 짝으로 하고 백일홍과 삼색도를 마주하게 했다. 그러나 그 이름과 뜻이 중복된 것은 깨닫지 못했던 듯하다.”*******
김일손은 자미와 백일홍, 산다와 동백이 한가지 꽃의 두 이름인데, 48영의 제목을 정할 때 짝을 맞추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김일손은 안평대군보다 40여년 후에 태어났으므로, 그리 세대가 멀지 않다. 아마도 김일손의 설명이 옳을 것이다. 이제 김일손의 발문을 바탕으로 백일홍에 대해 읊은 시를 감상해본다.
碧裙紅袖競嫣然 푸른 치마 붉은 소매로 아름다움 뽐내며
一種濃華浥露鮮 한 떨기 짙은 꽃이 이슬 젖어 곱구나
獨占風流當夏艶 여름철에 탐스러워 풍류를 독차지하니
不將顏色競春姸 구태여 안색으로 봄꽃들과 다투랴!
怕痒還擬爬仙爪 간지럼 싫어하여 신선의 손톱으로 간지럼 태워도
忍笑休敎狎禁筵 웃음 참고 대궐 자리에 가깝다 말하지 않네
別號誰煩題品妙 누가 번거롭게 별호로 묘한 시제를 정했나?
薇垣草詔憶芳年 미원에서 조서를 쓰던 꽃다운 시절 떠오르네
첫구의 ‘푸른 치마 붉은 소매’는 배롱나무 잎과 긴 원추형 꽃차례를 형용하는 듯하다. 3, 4구는 여름철에 피어 사랑받는 꽃이니 꽃 자체로 봄꽃과 무엇이 더 아름다운지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5, 6 구는 자미의 또다른 이름이 파양화怕痒花임을 활용하고 또 자미화를 궁궐 안에 많이 심은 정황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 7, 8구는 백일홍이라는 별호로 시제를 주어, 자미에 대해 2편을 짓게 된 정황과 더불어 김일손이 젊었을 때 사간원에서 근무했던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사실이지 배롱나무인 자미화는 문일평이 “귀인貴人이 상완賞玩하는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고 말했듯이 명문세가에서 아꼈던 꽃이었을 것이다. 배롱나무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해서 남도지방에 주로 많고, 서울 인근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아마도 안평대군은 배롱나무를 키우면서 추위 대비를 철저히 했을 것이다. 지금도 서울 경기에서는 배롱나무 고목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저 남쪽 지방으로 가면 고가나 이름난 절 정원에 자라고 있는 배롱나무 고목들을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몇 번의 남도 여행에서 내가 감상했던 배롱나무를 꼽자면, 안동 병산서원. 안동 만휴정, 풍산 체화정, 고창 선운사, 장흥 보림사, 김제 귀신사, 창녕 성씨 고택 등의 배롱나무가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서울 이곳 저곳에서도 만개한 배롱나무를 감상할 수 있다. 꽃다운 나이에 화를 당한 성삼문과 김일손의 배롱나무 시를 읽으니, 권력의 비정함에 타오를 듯 만발한 배롱나무 꽃이 애처럽기도 하다. 갑자기 김일손 시의 5, 6구가 대궐에서 임금과 가까운 자미화지만 임금과 가깝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힌다.
<끝>
*비해당48영의 제목은, 1 梅窓素月, 2 竹逕淸風, 3 日本躑躅, 4 海南琅玕, 5 翻階芍藥, 6 滿架薔薇, 7 雪中冬白, 8 春後牡丹, 9 屋角梨花, 10 墻頭紅杏, 11 熟睡海棠, 12 半開山茶, 13 爛熳紫薇, 14 輕盈玉梅, 15 忘憂萱草, 16 向日葵花, 17 門前楊柳, 18 窓外芭蕉, 19 籠煙翠檜, 20 映日丹楓, 21 凌霜菊, 22 傲雪蘭, 23 萬年松, 24 四季花, 25 百日紅, 26 三色桃, 27 金錢花, 28 玉簪花, 29 拒霜花, 30 映山紅, 31 梧桐葉, 32 梔子花, 33 苔封怪石, 34 藤蔓老松, 35 矜秋紅柹, 36 浥露黃橙, 37 蜀葡萄, 38 安石榴, 39, 盆池菡蓞, 40 假山煙嵐, 41 琉璃石, 42 硨磲盆, 43 鶴唳庭松, 44 麝眠園草, 45 水上錦鷄, 46 籠中華鴿, 47 木覓晴雲, 48 仁王暮鍾 이다.
**”안평대군이 노래한 비해당 사십팔영의 꽃 금전화金錢花는? - 금불초金沸草,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4년 5/6월호> (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78)
***原色園藝植物圖鑑 Vol.I,, 塚本洋太郞 著, 保育社, 昭和55, p.135.
****原色園藝植物圖譜 第5卷, 石井勇義/穗坂八郞 編, 誠文堂新光社, 昭和33, p.658
***** “木百日紅은 본래 이름이 紫薇花니 한국 남쪽에 고유한 자로 옛날부터 이를 百日紅이라 하였었고 草百日紅은 畿湖等地에서 百日紅이라 하나 西道에서는 百日花라 하며 日本에서는 百日草라 하는 것이니 멕시코 原産으로 朝鮮에 移種된 것이었다. … 그러나 貴人이 賞玩하는 木百日紅보다는 一般人이 볼 수 있는 草百日紅을 사랑하고 싶다. 이것이 비록 朝鮮의 原産이 아니요 外來의 꽃이나 今日에 와서는 널리 퍼져 어느 사람의 庭園에서든지 이 꽃을 發見하게 되는 바 아름다운 香氣는 不足하되 꽃빛이 예쁘고 花期가 長久하므로 사랑을 받게 되니 花판에서는 한 겹으로 내지 열 겹 넘는 것이 있으며 빛깔에는 紅 赤 紫 黃 樺(부들이삭빛) 白 등 여럿이 있어 여름에서 가을까지 主人의 눈을 가장 기쁘게 해 준다.” - 화하만필, 문일평 저, 삼성문화문고19, 1972, pp.78~80.
****** 양화소록 개정2판, 강희안 지음, 서윤희, 이경록 옮김, 눌와, 2024년. 부록으로 수록된 영인본 대조. (아마도 안평대군이 지은 비해당48영 원문과 서문 혹은 발문이 발견되면 왜 배롱나무 꽃과 동백꽃에 대해서만 2수를 지었는지 그 사정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문한 탓에 아직 나는 원문을 보지 못했다.)
******* 右四十八詠 四十八物 一物各有一物之故 傳曰 詩可以觀 多識於草木鳥獸之名 四十八詠 殆庶幾焉 夫草木鳥獸之生與性 有遠近淸濁之不同 古今人物 各有貴賤好惡之殊致 而得失從可觀 第其中有可疑者 臣心有疑 而若默不洩 則非事君無隱之道也 紫薇之與百日 山茶之與冬柏 一花兩名 古俗異稱 而今岐爲四詠 豈自有別種歟 抑初立題者 狃於偶儷 以山茶配海棠 百日對三色 而不自覺其名義之重複歟 – 濯纓集 四十八詠跋 (‘一物各有一物之故’는 동어 반복이어서, 앞 문장의 뜻으로 미루어 ‘一詠各有一物之故’가 아닐까 추정해본다.)
.******** 김일손은 성종 22년 (1491) 3월에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4월에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다고 한다. 28세 때이다. 그 다음해 9월에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나 곧 사가독서했다고 그의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1498년 무오사화로 화를 당할 때가 35세였다.
+표지사진 - 배롱나무 꽃 (2021.7.30 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