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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Sep 02. 2024

‘비해당48영’의 “향일규화向日葵花”는 접시꽃!

비해당48영 꽃 이야기(3)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의 비해당48영에 대해 브런치에 올리는 3번째 이야기이다.* 우리 옛글의 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이 비해당48영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원예관련 문헌으로 가장 오래되었다는 <양화소록>에서 강희안姜希顔(1417~1465)은 노송老松에서 석창포石菖蒲까지 16종의 식물을 다루었는데 반해, 동시대에 지어진 비해당48영에서는 매창소월梅窓素月부터 분지함담盆池菡蓞까지 38종 가량의 식물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48영의 식물명 중 매화(梅), 대나무(竹), 작약(芍藥), 모란(牡丹) 등 상당수는 지금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서 현대 식물분류상 어떤 종(species)인지 쉽사리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식물명은 특정 한자가 뜻하는 식물이 여러 종(species)이고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에 그 작업이 간단치 않다. 최근에 꽤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화훼문화 확산을 위해 ‘비해당48영’을 다룬 기사를 접했다. 그 중 “향일규화向日葵花”를 “해를 향하는 닥풀”로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48영의 규화葵花를 접시꽃으로 믿고 있었던 터라, 다시한번 내 이해가 타당한 것인지 재검토해본다.


아욱 (2022. 7. 24 춘천)
접시꽃 (2022. 7. 30 공주)
닥풀 (2022. 9. 9 안동)


옛글에서 ‘향일向日’ 즉 해를 향한 충성심을 뜻하는 식물로는 ‘규葵 (아욱)’과 ‘촉규蜀葵 (접시꽃)’, ‘황촉규黃蜀葵 (닥풀)’이 혼용되어 있다. 대체로 꽃을 강조한 규화葵花는 접시꽃을 뜻하는 경우가 많고, 닥풀의 경우 황색 꽃을 강조하여 황규黃葵나 황촉규黃蜀葵로 표현하고 있다. 장지연張志淵(1864~1921)의 <채소재배전서>를 보면 “황촉규黃蜀葵는 속명이 ‘해바라기’이니, 곧 향일화向日花”라고 하여, 닥풀을 ‘향일화’라고도 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향일규화’를 향일화, 즉 ‘닥풀’로 해석한 듯하다. 하지만 ‘향일규화’에서 ‘향일’은 수식어로 쓰였으며 식물명인 ‘규화’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이다.**


‘규葵’로 표현되는 아욱과 접시꽃, 닥풀은 모두 아욱과에 속하지만 꽃과 잎의 특징이 뚜렷이 구별된다. 잎을 식용으로 하는 아욱(Malva verticillate)은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연한 분홍색 꽃이 피고, 접시꽃(Althaea rosea)은 대체로 무궁화 꽃보다 큰 가지각색의 꽃이 핀다. 한편 닥풀(Hibiscus Manihot)은 꽃이 8~9월에 연한 황색으로 피고, 5~9개로 깊게 갈라지는 잎을 가지고 있다. 이제 이 정도의 식물 특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48영의 ‘규화葵花’가 무엇인지 화운和韻 시의 꽃 묘사를 통해 검토해보자.



(1) 幽香最入詩人腹  그윽한 향기는 시인이 즐겨 노래하고

      濃態還輕歌女脣  농염한 자태는 가녀의 입술을 가벼이 여기네


(2) 翠萼丹華去歲春  작년 봄에 피었던 비취색 꽃받침의 붉은 꽃이

      今年依舊見墻垠  올해도 옛날처럼 담장 가에 보이네


(3) 火爍丹葵一檻春  불처럼 빛나는 붉은 ‘규葵’가 봄날 고당에서

      高標幾朶襯烟垠  고상한 품격으로 몇 떨기 뜰 가에 피었네


(4) 蕊作紫房棲浪蝶  꽃술로 자줏빛 방 지으니 팔랑 나비 깃들고

      帶爲金盞潤乾唇  금잔 모양으로 매달려서 마른 입술 적셔주네



(1)은 성종成宗(1457~1494), (2)는 홍귀달洪貴達(1328~1504), (3)은 박상朴祥(1474~1530), (4)는 채수蔡壽(1449~1515)가 각각 ‘향일규화’를 읊으면서 꽃을 묘사한 부분이다. 한결같이 꽃을 붉은 색으로 묘사하고 있고 꽃 피는 시절도 봄이라고 했다. 닥풀 꽃은 보통 8-9월에 연한 황색으로 피므로, 이러한 표현을 통해 비해당48영의 규화는 닥풀이 아니라 접시꽃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나재집 중 향일규화 (고전종합DB 이미지)


<양화소록>에 등장하는 식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선학들의 연구가 쌓이면서 지금은 거의 표준 해석으로 정착되어 가는 듯하다. ‘비해당48영’의 식물들도 여러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므로 곧 그 실체가 모두 드러날 것이다. 식물애호가로서 이 연구 과정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조금은 장황하게 ‘향일규화’는 닥풀이 아니라 접시꽃임을 밝혀보았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몇 구절 살펴본 나재懶齋 채수蔡壽가 읊은 ‘해를 향하는 접시꽃 (향일규화)’ 전체를 감상해본다.



        群芳歷亂送殘春  온갖 꽃들 어지러이 늦봄을 보내는데

        獨有孤叢托地垠  외로운 꽃 떨기 홀로 마당 가에 피었네

        翠葉却從根底衛  푸른 잎은 뿌리 좇아 밑을 지키고

        丹心擬向日邊親  붉은 마음은 태양 곁으로 향하려는 듯

        蕊作紫房棲浪蝶  꽃술로 자주빛 방 지으니 팔랑 나비 깃들고

        帶爲金盞潤乾唇  금잔 모양으로 매달려서 마른 입술 적셔주네

        花中有此馨香德  꽃 중에도 이러한 향기로운 덕 있는데

        可愧人間負德人  부끄러워라, 덕을 저버리는 인간들



마당 가에 피어있는 접시꽃 (2024. 7. 19 평창)


채수蔡壽는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조의 문신이다. 연산군 때는 외직을 구하여 무오사화를 피하고, 갑자사화 때는 귀양갔다가 풀려났으며,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에 녹훈되었지만 벼슬살이를 부끄러워하여 경상도 상주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했다고 한다. 이 시는 성종대왕이 지은 비해당48영의 화운 시이므로 아마도 성종 재위시에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조정은 시끄러웠나 보다. 임금을 향한 충성심을 상징하는 접시꽃을 읊으면서 채수는 덕을 저버리는 벼슬아치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종신토록 덕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은거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끝>

*브런치에 올린 '비해당48영' 꽃 이야기 : 금전화(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78)와 백일홍(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116).

**김일손金馹孫이 탁영집의 ‘48영발’에서 “처음 제목을 정한 사람이 짝으로 대구對句를 만드는데 익숙하여 산다와 해당을 짝으로 하고 백일홍과 삼색도를 마주하게 했다.”라고 했다. 48영중 16번째 시인 ‘향일규화’의 대가 되는 시는 15번째 ‘망우훤초忘憂萱草’인데, 이 시에서도 근심을 잃는다는 ‘망우’는 훤초萱草, 즉 ‘원추리’를 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일규화’에서 식물명은 ‘규화’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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