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나무, 신나무, 단풍나무(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2년 9/10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에 미국풍나무(Liquidambar styraciflua L.)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다. 미국에서 도입되어 우리나라에 드물게 심는 정원수로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잎은 크게 다섯 갈래로 갈라져서 음나무 같기도 하고, 고로쇠나무 같기도 한 키 큰 나무이다. 열매는 지름 3~4cm 가량의 공 모양으로 표면에 날카로운 돌기가 촘촘히 나 있어 우둘투둘해 보인다. 벌써 꽤 세월이 흘렀지만, 이사온 첫 해 가을에 그 고운 단풍을 보고 반해서 이곳 저곳에 물어서 겨우 나무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나무 이름에 단풍나무 풍楓 자字가 쓰일 만 하다고 생각했다.
이 나무는 중국에서 풍향수楓香樹(Liquidambar formosana Hance.)로 부르는 나무와 같은 속이다. 아마도 풍향수를 우리나라에서 ‘풍나무’로 부르기 때문에 ‘미국풍나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중국 남부지방과 타이완 등지에서 자생하고 있는 풍나무는 잎 모양이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다. 가로수나 정원수로 많이 심는 중국단풍(Acer buergerianum Miq.)이나 신나무와 잎 모양과 비슷하다. 열매 모양은 미국풍나무와 비슷하게, 표면에 거친 가시가 밀생한다. 우리나라에는 자생하지 않지만 남부 지방에 일부 식재 한다고 하는데,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풍楓을 ‘단풍나무 풍’으로 읽고, 옛 글에 풍楓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흔히 단풍나무로 번역한다. 하지만, 중국 고전의 경우 이 글자는 단풍나무가 아닐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초사식물도감>과 <당시식물도감>, <식물의 한자어원사전>도 풍楓을 풍향수楓香樹(Liquidambar formosana Hance.), 즉 풍나무로 해설하고 있다. 풍나무는 조록나무과 리퀴담바르속 나무로, 같은 풍楓 자字를 쓰긴 하지만 시과(翅果) 열매를 맺는 단풍나무과 단풍나무속(Acer) 나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므로, 당시唐詩의 풍楓은 풍나무이므로, 막연히 단풍나무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수레 멈추고 앉아 늦가을 풍림楓林을 즐기노라니, 서리 맞은 잎사귀가 봄 꽃보다 붉구나 (停車坐愛楓林晚 霜葉紅於二月花)”라는 두목杜牧(803~852)의 시 ‘산행山行’의 단풍도 풍나무 잎이 물든 것이다. 이른바 ‘가을 단풍이 봄 꽃보다 붉다’고 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단풍나무를 떠올리지만 중국에서는 풍나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장계張繼(715~779)의 유명한 시, ‘풍교에 밤에 배를 대고 (楓橋夜泊)’의 풍교도 풍나무 숲이 있는 다리인데, 이 시를 임창순 선생 번역으로 감상한다.
月落烏啼霜滿天 달 지고 까마귀 울며 서리는 하늘에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 강가 풍나무와 고기잡이 불이 근심어린 잠을 대하였다.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밖 한산사의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 배에 이른다.
이제 우리 고전에서 풍楓이 어떤 나무를 가리키는지 알아본다. 풍楓에 대해 한글 훈을 달아놓은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 <훈민정음해례본>인데, 여기에서는 “싣 위풍爲楓”, 즉 “풍楓을 ‘싣’나무’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훈몽자회>도 풍楓을 “싣나모풍, (중국) 민간에서 다조수茶條樹라고 한다. 또한 색목色木으로 부른다”*고 했다. 중국에서 신나무(Acer tataricum L.)를 지금도 다조축茶條槭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최세진은 신나무를 풍楓으로 본 듯하다. 아마도 단풍나무 속 중에서 잎 모양이 풍나무와 가장 유사하기 때문에 풍楓을 신나무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다가 <자전석요>에서 풍楓에 ‘단풍나무 풍’이라는 훈을 단 후부터 옥편이나 사전에서 일관되게 ‘단풍나무’라고 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풍楓을 신나무나 단풍나무로 본 것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단풍나무가 아닐 것이라고 의문을 제기한 문헌도 있다. <전운옥편>은 “楓풍 섭欇이다. 백양白楊 비슷하며, 잎은 둥글고 갈라졌다. 진과 향기가 있다.”**라고 글자를 해설했다. 유희의 <물명고>에서는 “풍楓, 나무가 백양白楊처럼 높고 크다. 잎은 원형이며 세 갈래로 갈라진다. 꽃은 희고 열매는 오리 알 정도 크기이며, 나뭇결은 푸른 색이다. ‘고리신나무’로 향풍香楓, 청풍靑楓, 섭섭欇欇이다. 당시唐詩의 ‘햇살에 빛나는 단풍 나무 모두 시드네 (背日丹楓萬木凋)’라는 구절이 향풍香楓을 가르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른바 단풍이라는 나무가 따로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단풍나무와 같은 것인가? 마수蟆手, 다조茶條를 진짜 풍楓나무로 알고 있지만 이는 잘못 아는 것이다.”***라고 하여 풍楓이 우리가 말하는 단풍나무는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아언각비>에서 정약용도 풍楓을 단풍나무라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풍楓을 단풍나무(楓)라고 하는 것도 믿을 만 하지 않다. <본초本草>와 <화경花鏡> 등 여러 책을 살펴보면, 모두 “2월에 흰 꽃이 피고 나서 곧바로 열매가 맺히는데 용안龍眼(Dimocarpus longan Lour.)처럼 둥글다. [<남방초목상南方草木狀>에서는 풍향수楓香樹라고 한다. 열매가 오리 알 같이 크다.] 위에 날카로운 가시가 있어서 먹을 수 없다. 오직 불에 태워야 향기가 난다. 그 나무의 진을 백교향白膠香이라고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동방의 단풍나무(楓)는 꽃도 없고 열매도 없다. 또한 진이나 아교도 없다. 오직 서리가 내린 후 잎이 붉어진다는 것만 여러 문헌과 일치할 뿐이다. 그리고 여러 책에서 그 나무로 가장 큰 것으로는 동량의 재목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는데, 우리 동방의 단풍나무는 높이가 불과 한두 길(丈)이다. 북한산성의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데, 나무는 모두 나지막하고 작다.”****
유희나 정약용 등 일부 학자들이 풍楓이 ‘단풍나무’가 아니라고 논증했지만, <훈민정음해례본>이나 <훈몽자회>의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풍楓을 오랜 옛날부터 ‘신나무’나 ‘단풍나무’로 사용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글자는 중국 고전에 실려있으면 ‘풍나무’로, 우리나라 고전에 쓰였으면 ‘신나무’나 ‘단풍나무’로 문맥을 잘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
한편, 정태현은 <조선삼림식물도설>에서 신나무의 한자명으로는 풍수楓樹를 기재했고, 당단풍나무와 단풍나무의 한자명은 각각 당단풍唐丹楓과 단풍丹楓을 들고 있다. 이런 점을 참고하여, 우리 고전의 풍수楓樹는 신나무로, 단풍丹楓은 당단풍나무나 단풍나무로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단풍丹楓은 특정 나무가 아니라 가을에 잎이 물든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으므로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또한, 시어에서 단풍나무와 당단풍나무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은 적지만, 당단풍나무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생하는데 반해 단풍나무는 주로 남부지방과 제주도에만 자생하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일성록>의 정조7년(1783) 9월 30일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내(정조)가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1718~1786)에게, ‘경모궁景慕宮 앞길에 나무를 심은 곳이 아직도 나무가 드문드문한 것이 근심스럽고, 유관문逌觀門 밖은 빈 땅이 너무 넓으니, 풍목楓木 종류를 모쪼록 많이 심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구선복이 ‘이미 나무를 캐오도록 장교將校 몇 명을 북한산北漢山 근처에 보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여기에서 정조가 말한 풍목楓木은 북한산에서 캐 오는 것으로 보아, 신나무나 당단풍나무일 것이다.
사실 우리 고전의 풍楓, 풍목楓木, 풍수楓樹, 단풍丹楓이 각각 단풍나무속 중 어떤 나무인지 밝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신나무와 단풍나무로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최대한 추정해 본다면, 여말선초의 문신 조준趙浚(1346~1405)의 송당집松堂集에 실려있는 ‘풍수楓樹를 읊다 (詠楓樹)’의 풍수楓樹는 신나무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1628)이 읊은, ‘동갑인 이해李海의 과천 별장 팔영 (題李同年海 果川別業八詠)’ 중 하나인 ‘양곡풍남陽谷楓楠’에서 단풍丹楓은 당단풍나무일 것이다. 이제 이 두 수의 시를 감상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풍수楓樹를 읊다 (詠楓樹)
酷愛雙楓樹 두 그루 신나무 너무 사랑스러워
移根托竹林 대나무 숲으로 옮겨 심어 두었네
霜酣一片赤 서리 내리자 한 쪽부터 붉어지는데
似識主人心 주인 마음을 아는 듯 하구나
양곡陽谷의 단풍나무와 만병초 (陽谷楓楠)
千千石楠樹 수많은 만병초들
間以丹楓枝 사이사이로 단풍나무 가지들
窈窕陽之谷 아늑한 양지 골짜기에서
秋看錦繡披 가을이면 펼쳐진 비단을 보네
(2018.7.28 처음 쓰고 2021년 4월 보완,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2년 9/10월, pp.62~69.)
*楓 싣나모풍 俗呼茶條樹 又呼色木 – 훈몽자회
**楓풍 欇也 似白楊 葉圓岐 有脂而香 – 전운옥편
***楓 樹高大 似白楊 葉圓有三歧 花白 實大如鴨卵 木理靑色 고리신나무 = 香楓 靑楓 欇欇. 唐詩 背日丹楓萬木凋 之語 未知指香楓歟 抑別有所謂丹楓者 如東國所呼乎 蟆手 茶條 遂認眞楓 誤矣 – 물명고
**** 楓之爲楓 亦未可信 按本草及花鏡諸書 皆云 二月開白花 旋卽著實 圓如龍眼 [南方草木狀云楓香樹 子大如鴨卵] 上有芒刺 不可食 唯焚作香 其脂名曰白膠香 吾東之楓 無花無實 亦無脂膠 唯霜後葉赤 與諸文合耳 諸書又謂其樹最高大 可作棟梁之材 而吾東之楓 高不過一二丈 北漢山城丹楓最佳 而樹皆低小 – 아언각비
***** 予謂訓將 具善復曰 景慕宮前路植木處 尙患稀疏 而至於逌觀門外 則隙地甚廣 如楓木之類 須爲多植可也 善復曰 已採木事 發遣數校於北漢近處矣 – 일성록
+표지사진 - 봄꽃보다 붉은 당단풍나무 단풍, 2020.11.2 천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