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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Oct 08. 2021

과진이내果珍李柰, 과일 중 보배인 자두와 사과

리李, 내柰, 頻婆, 林檎 (향토문화의사랑방안동  2021년 11/12)

벌써 수십 년 전이지만, 시골 농부로 평생을 사셨던 선친께서 급작스레 돌아가시고, 경황이 없었을 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선친께서 보시던 책들을 싸서 성남의 우거로 가져왔다. 그 중에 붓글씨로 필사한 천자문의 복사본 한 권이 있었다. 이 천자문은 조부님께서 장손인 대구 큰형님을 가르치기 위해 손수 쓰신 것인데, 말미에 “정유丁酉(1957)년 음력 12월 상순에 와우산인臥牛山人 경와자敬窩子는 다섯 살 손자 권상렬權相烈에서 써서 주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그 내력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큰 애가 다섯 살 무렵이었는데, 아무래도 손자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려고, 대구 큰댁에 있을 원본을 복사하여 손수 오침안정법으로 깔끔하게 묶어둔 것이리라.


천자문 필사본 일부, 경와 권호윤이 1957년 손자 권상렬을 위해 쓴 필사본이다.


나는 선친의 뜻을 헤아려서, 부족하지만 큰애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하늘천(天) 따지(地)부터 온호(乎) 이끼야(也)’까지 천자문을 가르쳤다. 나도 어릴 적에 선친으로부터 천자문은 배웠지만 쉬운 내용이 아니라서, <주해천자문> 등을 내가 먼저 공부하고 나서 아이를 가르치곤 했었다. 이 천자문에 과진이내果珍李柰라는 네 글자가 포함되어 있는데, <주해천자문>은 “실과 과, 보배 진, 오얏 리, 벗(멋) 내”라고 훈을 달고 있다. ‘오얏’은 ‘자두’임을 알고 있어서 제대로 설명해주었지만, ‘내柰’은 주석으로 ‘빈파蘋婆’라고 했는데, 빈파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서 얼렁뚱땅 넘어갔다.


자도나무(자두나무), 2021.4.4 성남
자도나무(자두나무) 꽃, (좌) 2021.4.4 청계산, (우) 2020.4.18 남한산성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즉, “오얏나무 아래서는 관을 바루지 않는다”는 말로 유명한 조선왕조의 상징인 이李는, 우리나라에서는 <훈몽자회>에서부터 한결같이 ‘오얏리’로 이해했다. 단지 발음이, <훈몽자회>에서 ‘외엿 니’, <동의보감>에서 ‘오얏’, <광재물보>에서 ‘외얏’, 그리고 다시 <자선석요>부터 대부분 ‘오얏리’로 훈을 달았다. 이 오얏은 현재 우리가 자두라고 부른다. 자두는 자도紫桃가 변한 말로, 조선시대에도 ‘오얏’을 한문으로 자도紫桃라고도 표현한 듯 하다. 1937년간 <조선식물향명집>에서  Prunus triflora Roxb.(Prunus salicina Lindl.의 이명)의 향명으로 ‘자두나무’를 부여할 때, ‘(오얏) 李’를 부기하여 자두와 오얏이 같음을 밝히고 있다.


<본초강목>에서, “이李, 가경자嘉慶子이다. … 이李는 푸른 잎에 흰 꽃이고, 나무는 오래 견딜 수 있고 거의 백여 종에 가깝다. 열매는 큰 것이 잔이나 알 같고, 작은 것은 탄환이나 앵두 같다. 맛은 달고 시고, 쓰고, 텁텁한 것 등 여러 종류가 있다. …”로 나온다. <중약대사전>은 이李를 자두나무(Prunus salicina Lindl.)로 설명하고, 이명으로 가경자嘉慶子를 기재하고 있으므로, 본초강목의 이李가 자두나무임을 알 수 있다. <식물의 한자어원사전>도 이李를 자두나무(Prunus salicina 嘉慶子)로 설명한다. 즉 동양 3국에서 이李는 모두 자두나무를 가리키는데, 자두나무는 만주를 포함한 중국 원산이다. 우리나라에서 과일로 재배한 역사가 깊으며, 강원도 일원에서는 ‘고야’라고 불리는 자생종 자두나무를 드물게 만날 수 있다. 내 고향에서는 자두를 '추리'라고 불렀고, 또 자두보다 크기가 작은 재래종을 '꼬약'이라고 불렀는데, 이 꼬약이 고야일지도 모르겠다.


(좌) 고야 꽃, 2021.4.16 화야산, (우) 고야 열매, 2021.6.12 인제


이제, 내가 큰 아이에게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보배로운 과일 내奈에 대해 알아보자. 고전 번역서들에서는 주로 내奈를 능금으로 보는 듯하다. 능금은 임금林檎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흥미롭게도 <훈몽자회>에는 내柰와 임금林檎이 모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실려있다. “내㮈, 멋 내, 내柰와 통하여 쓴다.” “금檎, 냉그[ㅁㅅ] 금, (중국에서) 속칭 사과沙果 혹은 소임금小林檎이다.”*** 이를 보면 1500년대 당시, ‘멋’과 ‘임금’을 구분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능금은 중국 민간에서 사과라고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본초강목>의 내柰와 임금林檎 설명에서도 비슷한 해석을 볼 수 있다.


“내柰, 빈파頻婆이다. … 전문篆文의 내柰라는 글자는 열매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형상한 것이다. 범어梵語 말로 빈파頻婆라고 한다. ... 내柰와 임금林檎은 한가지 류類의 두 종種이다. 나무와 열매 모두 임금과 비슷하지만 크다. 서쪽 지방에 가장 많으며, (종자를) 심을 수도 있고 (가지를) 눌러 번식시킬 수도 있다. 백白, 적赤, 청青의 세가지 색이 있다.” ****


“임금林檎, 내금來禽, 문림랑과文林郎果이다. … 이 과일은 맛이 달아 뭇 날짐승들을 오게 할 수 있으므로 임금林禽이나 래금來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임금은 곳곳에 있고, 내柰와 비슷한 나무이다. 대개 2월에 분홍색 꽃이 피고 열매도 내柰와 같지만 둥글기가 다르고 6월 7월에 익는다. … 임금은 곧, 내柰의 작고 둥근 것이다.“ *****


현대 중국의 본초학 문헌인 <중약대사전>을 살펴보면 내柰와 빈파頻婆가 빈과頻果(Malus pumila Mill.)의 이명으로 나오는데, 이 빈과를 우리나라에서는 사과나무라고 부른다. 사과나무는 서아시아, 유럽 원산으로, <본초강목>에서 “서쪽 지방에 가장 많”다고 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또한 임금林檎은 Malus asiatica Nakai로 보는데, 우리가 현재 ‘능금나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중약대사전>에 임금의 이명으로 래금來禽과 함께 사과沙果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훈몽자회>에서 ‘능금(檎)’을 중국 속칭 사과라고 한 기록과 일치한다. 능금나무는 만주를 포함한 중국 일대가 원산지이고 한반도에는 도입된 종이라고 한다.


위 기록들에 의거하면, ‘사과’는 중국에서 능금(林檎)의 이명으로 쓰였고, 이 사실은 1527년 간행 <훈몽자회>에도 실려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능금보다 큰 빈과頻果, 즉 우리말로 ‘멋’이라고 불렀던 과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1780년 북경을 다녀온 후 저술한 여행기 <열하일기>에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열하의 장터에서 본 마술을 기록한 ‘환희기幻戱記’중에 마술사가 보자기 밑에서 빈과蘋果 3개를 꺼내어 파는 장면이 있는데, 이 빈과에 대한 박지원의 다음 주석이다.


“빈과蘋果는 곧 우리나라에서 사과沙果라고 부르는 것이다. 중국에서 사과라고 부르는 것은 곧 우리나라의 임금林檎이다.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빈과蘋果과 없었는데,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1648~1723) 공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 가지에 접을 붙여 귀국하면서 우리나라에 비로소 많이 퍼졌으며, 그 이름은 잘못 전해졌다고 한다.”******


사과나무 꽃, 2021.4.24 물향기수목원


임금林檎, 즉 능금은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시에 “7월 2일 임금을 먹다 (七月三日食林檎)”가 있듯이 최소한 고려시대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한 과일이다. 이에 반해 빈과蘋果, 즉 사과는 박지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 중엽에 전래된 듯하다. 이를 반영하듯, 우리나라 문헌에서 대체로 금檎이나 임금林檎은 ‘능금’으로 일관되게 설명했다. 즉, 임금林檎을 <동의보감>에서 ‘님금’, <광재물보>에서는 ‘능금’으로, 금檎을 <자전석요>에서는 ‘림금 금’, <한한대자전>에서는 ‘능금나무 금’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柰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훈몽자회>에서 ‘멋’으로, <동의보감>에서 내자柰子를  ‘먿’ 혹은 ‘농배’로 설명했지만, 1700년대 초반에 지어진 <광재물보>에서는 내柰를 ‘사과’라고 하고 임금林檎과는 다른 종으로, 더 크며 빈파頻婆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후, <자전석요>, <한선문신옥편> 및 <한일선신옥편>에서도 내柰를 ‘사과 내’로, 설명한다. 이는 조선 중기 이후에 사과가 전래되면서 각종 문헌에 반영되었음을 보여준다.


사과, 2021.10.9 정선

이제 ‘과진이내’의 내柰는 중국에서 빈과頻果 혹은 빈파頻婆라고 부르던 것이 ‘사과’로 와전되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지만, 능금 보다는 사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사과나무가 전래된 조선 말엽에, 귀양살이하던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지은 시 한 수를 감상한다. 벼슬살이에서 쫓겨난 지 10년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1810년 즈음에 지은 빈파頻婆, 즉 사과나무가 등장하는 ‘홀연히 (忽漫)’이다.


忽漫看花淚滿巾 홀연히 꽃을 보니 눈물이 수건 적시는데

十年前是內朝臣 십 년 전에는 조정의 신하였어라.

春氷虎尾無安土 봄 얼음 건너듯, 호랑이 꼬리 밟듯, 마음 놓을 곳 없으니

風雨鷄鳴憶遠人 비바람에 닭이 울면 멀리 있는 사람 그리워라

知己祗應泉下有 지기知己는 황천에나 있을 뿐이라

還家猶向夢中頻 꿈속에서 자주 돌아갈 집 향한다네.

碧梧陰下頻婆側 벽오동 그늘 아래 사과나무(頻婆) 곁에서,

記把張陳話宿塵 세상살이 어려움 한탄하며 이야기하던 기억이 떠오르네.


이 시의 마지막 구에는 “소릉少陵(이가환李家煥 1742~1801)이 일찍이 말하기를, ‘간사한 무리가 나를 잡으려고 천금千金을 걸 것이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럼 아무개는 오백금五百金으로 살 수 있을까?” 하고서, 서로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라는 정약용의 주석이 들어있다. 마지막 구절의 장진張陳은, 초한楚漢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기>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의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로서, 처음에는 부자처럼 친밀하게 지내다가, 나중에는 권력 앞에서 서로 적이 되어 싸우는 고사이다. 아직 장이와 진여가 서로 친할 무렵, 진秦나라에서 장이에게는 천금千金을, 진여에게는 오백금五百金을 현상금으로 걸고 잡고자 했다고 한다. 신유박해가 시작되기 전 어느 날 햇살아래 그늘을 드리워주는 벽오동 나무 아래 사과나무 옆에 서서 정약용과 이가환 장이진여열전의 고사를 되새기면서 세상살이 어려움을 토로하는 정경을 상상해본다.


사과나무 꽃, 2019.4.28 안동 고향마을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 선친께서는 사과 과수원 농사를 시작하셨다. 사과나무 묘목을 대구 근처 하양이라는 곳에서 사 오셨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나는데, 초기 묘목은 주로 홍옥과 국광이었다. 그 후 언제인가 부사 종류로 품종을 개량한 것으로 기억된다. 하여간 그 때부터 사과 농사는 우리 집의 주업이 되었으므로, 조무래기들을 포함하여 온 식구들이 힘을 모아 사과나무를 길렀다. 사과나무에 농약을 칠 때가 되면, 길고 긴 약 줄을 누군가 잡고 끌고 해야 했는데, 사과나무 약 치는 날은 으레 줄 잡아주러 밭으로 향해야 했다. 그리고 사과 따는 날도 식구들이 모두 모여 손을 보탰다. 요사이는 과수원에서 어른이 서서 사과를 딸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만 사과나무를 키우지만, 옛날에는 크게 키웠기 때문에 사과를 수확하자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따야 하곤 했다. 한여름 뙤약볕에 약 줄을 잡고 있자면, 언제 아버지가 약을 다 치시나 조바심치면서, 그저 빨리 큰 플라스틱 통에 든 약이 다 없어지기만 고대했다. 이제 그 사과 농사 이야기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선친께서 ‘과진이내果殄李柰’를 가르치면서 내柰를 ‘벗 내’로만 말씀하시고 사과라는 설명은 없으셨으니, 선친께서도 내柰가 사과인줄은 생각도 못하시고 그저 귀한 과일로만 아셨을 것이다.


<끝.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통권195호, 2021년 11/12월, pp.70~76.)


*歲丁酉除月上澣 臥牛山人敬窩子 書贈五歲權孫相烈 – 권호윤 필사 천자문

** 李 嘉慶子 … 李 綠葉白花 樹能耐久 其種近百 其子大者如杯如卵 小者如彈如櫻 其味有甘酸苦濇數種 其色有青綠紫朱黃赤縹綺胭脂青皮紫灰之殊 – 본초강목

*** 㮈 멋내 通作柰 檎 냉금(사ᅠ)금. 俗呼沙果 又呼小林檎 – 훈몽자회

****柰 頻婆 … 篆文柰字 象子綴于木之形 梵言謂之頻婆 … 柰與林檎 一類二種也 樹實皆似林檎而大 西土最多 可栽可壓 有白赤青三色 – 본초강목

*****林檎 來禽 文林郎果 … 此果味甘 能來眾禽于林 故有林禽 來禽之名 … 林檎 在處有之樹似柰 皆二月開粉紅花 子亦如柰而差圓 六月七月熟 … 林檎 即柰之小而圓者 – 본초강목

******蘋果 卽我國所稱沙果 中國所稱沙果 卽我國林檎 我國古无蘋果 東平尉鄭公載崙奉使時 得接枝東還 國中始盛而名則訛傳云 – 熱河日記 幻戱記

******* 少陵嘗云 憸夫購我以千金 余曰某可得五百金購乎 相視大笑 – 여유당전서 시

+표지사진 - 고야 열매, 2019.7.7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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