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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Jun 25. 2021

부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나무에서 겨울나그네까지-보리수

보리수菩提樹와 피나무杻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2년 5/6월호)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보았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Der Lindenbaum)이다. 벌써 오래 전인데, <한국의 나무> 저자인 김태영 선생과 함께 천마산을 걸으면서 하늘을 향해 아름드리로 자란 멋진 피나무를 감상한 적이 있다. 이때 김선생은, 우리가 아는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는 나무 이름을 잘못 번역한 거라는 말과 함께,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나무인 인도보리수나 우리가 열매를 먹기도 하는 보리수나무와는 관계가 멀다고 했다.


보리수나무 (좌) 꽃, 2021.5.2 성남, (우) 열매, 2016.10.9 성남 - 관목상으로 열매를 먹을 수 있고, 인도보리수와는 관계가 없다.


대신, 린덴바움(Lindenbaum)은 우리나라의 피나무(Tilia amurensis Rupr.)나 찰피나무(Tilia mandshurica Rupr. & Maxim.)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 얼마 후 오산의 물향기수목원에 갔을 때 유럽피나무(Tilia × europaea L.)를 보았다. 아쉽게도 꽃은 지고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피나무 꽃이 만발할 때 그 나무 아래 앉아 꽃 향기를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2017년 6월 초에 미국 여행을 하다가 워싱턴 근교 알렉산드리아 구 시가지에서 미국피나무 꽃 향기를 마음껏 맡았다. 짙은 꽃 향기에 취해 있자니, 과연 그 그늘 아래에서 단꿈을 꿀 수 있을 듯했다.


미국피나무, 2017.6.6 미국 알렉산드리아.

 

아마도 슈베르트가 노래한 린덴바움을 우리가 ‘보리수’로 노래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자면, 우리나라의 해외 교류사를 모두 들춰봐야 할 지도 모르겠다. 원래 ‘보리수菩提樹’는 석가모니가 그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가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인도에서 중국을 통해 불교 문명과 함께 삼국시대에 전래된 말이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에 나오는 보리수는 우리가 근대 서양 문명을 일본을 통해 도입할 때 소개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독일어 린덴바움(Lindenbaum)은 영어의 Tilia 혹은 Linden으로 피나무속에 속하는 나무를 말하는데, 독일에는 주로 넓은잎피나무(Tilia platyphyllos Scop.)와 작은잎유럽피나무(Tilia Cordata), 혹은 유럽피나무(Tilia × europaea L.)가 많다고 하므로, 슈베르트가 노래한 린덴바움도 이 나무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의나무>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linden tree로는 피나무(Tilia amurensis Rupr.)와 찰피나무(Tilia mandshurica Rupr. & Maxim.)가 전국적으로 자생하고 있고, 보리자나무(Tilia miqueliana Maxim.)가 전국의 사찰 일대에 심어져 있다.


보리자나무 (좌) 2019.3.23 장성 백양사, (우) 2021.5.22 고창 선운사
보리자나무 (좌) 2018.9.8 정선 정암사, (우) 2019.11.2 양평 사나사


이제 슈베르트의 린덴바움을 ‘보리수’로 번역하게 된 단서를 같은 linden tree중 하나인 ‘보리자나무’에서 볼 수 있다. 실제로 석가모니와 함께 한 ‘보리수’는 우리가 ‘인도보리수(Ficus religiosa L.)라고 부르는 무화과나무속의 상록활엽수이다. 이 나무는 열대지방에 자라는 나무로 우리나라에는 자랄 수 없다. 그래서 불교계에서는 중국 남부 지방 원산의 보리자나무를 ‘보리수’로 대용했는데, 이 흔적이 슈베르트 가곡 번역에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2017년 12월에 베트남 호치민시티의 식물원에서 인도보리수를 처음으로 친견했는데, 길다란 꼬리의심장형 잎이 인상깊었다. 보리자나무 잎 모양도 심장형으로 인도보리수 잎과 일견 비슷한데, 아마도 이 때문에 보리수 대용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인도보리수, 2017.12.25 베트남 호치민시티 - 무화과나무과로 긴 꼬리를 달고 있는 심장형 잎이 특징이다.


하여간,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의 린덴바움은 보통 영어권에서는 ‘linden tree’, 혹은 ‘lime tree’로 번역하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감리교 목사인 류형기柳瀅基(1897~1989)가 편집하여 1946년에 초판이 간행된 <신생영한사전新生英韓辭典>을 입수했다. Linden 항목을 찾아보니, “(植) 보리樹, 菩提樹 (= lime-tree)”라고 되어 있고 ‘linden’ 나무의 가지와 잎, 그 독특한 포가 달린 꽃 삽화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참조할 수 있었던 영한사전은 모두 linden을 ‘보리수’로 설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데, 린덴바움을 ‘보리수’로 번역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영한사전 류의 영향이 컸다고 하겠다.


(좌) 1946년 간행 신생영한사전, linden tree = 보리수, (우) 1924년 간행 식물명감, 보리자나무(Tilia miqueliana) = 보리수(ぼだいじゅ, 菩提樹)


이 <신생영한사전>의 편집자 머리말을 보면 주로 당시에 영어를 일본어로 해설하는 영일사전류를 기초로 편찬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서양 학문을 수입할 때 linden tree를 불교에서 ‘보리수’로 대용하는 보리자나무와 비슷한 점에 착안하여 ‘보리수’로 번역하고 이 영향이 고스란히 우리나라에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1925년 간행 <일본식물도감>과 1924년간 <식물명감> 등을 찾아보면, ‘보리자나무’를 일본에서 보리수(ぼだいじゅ, 菩提樹)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정태현이 1943년에 간행한 <조선삼림식물도설>도 달피나무(Tilia amurensis Rupr. 현재 피나무로 통합됨)와 염주나무(Tilia megaphylla Nakai, 현재 찰피나무로 통합된 듯함)의 한자명을 보리수菩提樹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피나무속의 나무를 보리수로 불렀음을 보여준다.


호기심이 생겨서 학창시절에 애용했던 민중서림 영한사전도 살펴보았다. 현대에 통용되는 이 사전에서도 linden을 “[植] 린덴 (참피나무속의 식물; 참피나무·보리수 따위)”로 설명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linden을 보리수로 배우고 있는 셈인데, 이는 수정되었으면 한다. 그렇지만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를 ‘피나무’로 바꾸어보면 연가戀歌의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으니 고민스럽긴 하다.


찰피나무 (좌) 2021.6.12 개인산, (우) 2018.11.3 창경궁

이 피나무과의 나무 중에 찰피나무는 중국의 고전 <시경> 소아小雅의 ‘남산에는 사초가 있고 (南山有臺)’ 등에 ‘뉴杻라는 글자로 나오는 나무이다.


南山有栲 남산에는 가죽나무 있고

北山有杻 북산에는 찰피나무가 있네

樂只君子 즐거워라 군자여

遐不眉壽 어찌 오래 사시지 않으랴.

樂只君子 즐거워라 군자여

德音是茂 칭송 더욱 높으시기를.

 

<시경식물도감>은 이 뉴杻를 현대 중국명 요단遼椴((Tilia mandshurica Rupr. et Maxim.), 즉 찰피나무로 설명하면서, 중국 화북華北 지역에 자라는 피나무속의 나무 여러 종이 뉴杻일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전역에 자라며 피나무와 찰피나무는 6~7월에 꽃이 피고 매우 향기롭다. 모두 큰 키로 자라는 교목이어서 저 나무 높은 곳에 꽃이 피어도, 향기만 풍길 뿐 가까이 보기는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찰피나무 꽃, 2017.7.1 천마산


나는 슈베르트의 가곡 속 ‘보리수’가 피나무속의 나무임을 알고 난 후, 산길을 걸을 때 마다 피나무와 찰피나무를 살폈고, 만날 때마다 무척 반가웠다. 상기의 미국여행에서 미국피나무 꽃향기를 만끽했던 그해 7월 초에는 김태영 선생 등과 피나무를 만나러 천마산에 올랐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아름드리 피나무를 산 중턱에서 만났을 때에, 은은한 꽃 향기가 느껴졌다. 무성한 나뭇잎이 하늘을 가려, 고개를 들어 저 높은 나무 끝 자락을 쳐다 보아도 꽃은 보이지 않는다. 꽃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찍은 미국피나무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김태영 선생이 잎 뒷면이 희게 빛나는 것으로 보아 피나무 보다는 찰피나무에 더 가깝겠다고 한다. 다시 한참을 걸어서, 개다래 꽃잎이 향기를 간직한 채 떨어진 곳을 지나, 드디어 찰피나무도 만났다. 찰피나무는 꽃이 가까이 있어서인지 향기가 더 진하게 풍겼고, 꽃도 잘 보였다. 한참 동안 찰피나무 아래를 서성이며 향기를 맡았다. 이곳은 단꿈을 꾸고 싶을 때면 언제나 올 수 있는 도시의 공원이 아니므로, 꽤 오랬동안 거닐며 그 향기를 음미했다.


피나무 꽃, 2019. 7. 7. 정선


그 후 나는 남한산성, 청계산, 화야산, 치악산, 화악산, 태백산, 개인산, 정선 등지에서 피나무와 찰피나무는 자주 만났는데, 만날 때 마다 어떤 즐거움이 있었다. 그 하트 모양의 잎이며, 향기로운 꽃, 독특한 주걱모양의 포에 매달린 열매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붉은 빛이 감도는 오동통한 겨울눈도 아름답다. 특히 2019년 7월 석회암 지대의 식물상을 관찰하러 정선에 갔을 때는 가파른 언덕길 바로 가까이에서 만발한 피나무 꽃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올해에는 아직 피나무 꽃 향기를 맡지 못했다. 지난 6월 초 인제 개인산에서 만난 피나무와 찰피나무는 아직 꽃망울이 맺혀 있는 상태였다. 지난 6월 19일, 갑자기 지금쯤 유럽피나무도 꽃이 피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까운 오산의 물향기수목원으로 달려갔지만, 아쉽게도 유럽피나무는 벌써 꽃이 지고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아직 산 속에는 7월 초순까지는 피나무 꽃이 피어 있을 터이니, 조만간 다시 산 길을 걸어야겠다.


유럽피나무, 2021.6.19 오산 물향기수목원 - 꽃이 지고 열매가 익어가고 있다.
작은잎유럽피나무(코다타피나무) (좌) 수피, (우) 수형, 2021.8.29 한택식물원


(시경은 이가원 번역 참조, 2017.7.2 처음 쓰고 2021년 6월 보완,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2년 5/6월호 pp.72~79)


 * 本書를 編纂함에 있어서 우리는 最大量의 知識을 最少量의 紙面에 收合하는 同時에 學徒의 視力을 保護하려는 丹誠으로 從來 學生界에서 愛用된 硏究社 ‘스쿨英和辭典’을 基礎로 하고, 同社 ‘新英和大辭典’, 富山房 ‘大英和辭典’, 大倉書店 ‘大英和辭典’, 三省堂 ‘英和大辭典’, ‘콘사이쓰英和新辭典’,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Webster’s Colleageate Dictionary 等을 參考하여 本辭典을 만들었다. … 一九四六年八月十五日 柳瀅基. - 신생영한사전新生英韓辭典 머리말 중에서.

+표지사진 - 피나무 꽃, 2019.7.6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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