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반,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을 떴다. 오전 여덟 시 십분 멜버른행 비행기를 타러 서둘러야 한다. 그와 나는 각각의 캐리어를 굴려 아들의 기숙사를 나와서 어두운 새벽길을 조심히 걸었다. 내 보라색 캐리어에는 전기장판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보라색 도넛 방석도 손에 꼭 쥐었다.
여행의 필수 품목은 건강이다. 걸을 수 있는 두 다리와 맑은 머리 그리고 캐리어를 끌어 옮길 수 있는 작은 힘에 감사했다.
아들의 졸업 행사 후 호주에 머무는 동안 남편과 둘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시드니 말고도 호주에는 멋진 도시들이 많아 어디로 여행할지 결정이 쉽지 않았다. 휴식과 여기를 즐기기 좋은 골드코스트코, 대도시 브리즈번, 호주의 수도이자 중심인 캔버라, 청정 자연 속에 식재료가 풍성한 태즈메이니아 그리고 모던한 건물과 역사 깊은 유럽의 건물이 그대로 공존하는 멜버른.
시간 여유가 있다면 다 둘러보고 싶지만, 아들이 추천한 브리즈번과 딸이 추천한 태즈메이니아는 나중을 기약했다. 문화와 역사의 도시이자 커피가 맛있는 곳 멜버른으로 향한다.
아직 밖이 어둑한 새벽 다섯 시 반, 일터로 향하는 노동자들이 멈추는 역마다 올라탄다. 형광 조끼를 걸치고 도시를 청소하기 위해 떠나는 이들, 시드니 시내 백화점과 상점에서 판매를 위해 출근하는 이들, 여행을 위해 캐리어를 들고 공항으로 떠나는 나 같은 이들. 센트럴 스테이션으로 향할수록 지하철에 올라탄 인원은 계속 늘어간다. 각자의 이유로 새벽을 시작한 이들의 열정을 구경한다.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맞은편에서 두꺼운 책을 펼쳐 읽고 있는 여성이다. 처음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조용히 앉아, 빨간 매니큐어 바른 손으로 책장을 한 장씩 넘긴다. 안정적인 자세로 앉은 중년의 단발머리 그녀는 네모난 금테 안경을 콧잔등에 걸친 채 조용히 책을 읽어 간다. 오늘부터 새 책을 시작했는지 한두 페이지 펼쳐진 두툼한 책을 오른손에 받치고 왼손으로 한 장씩 책장을 넘기며 정복한다. 책 읽는 이가 반갑고 귀하게 보인다.
호주를 여행하는 동안 종이책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종종 만났다. 해가 쨍하니 내리는 외부 지하철 역사에서 책을 펼쳐 든 소년, 멜버른 시내로 향하는 흔들리는 공항버스에서 한 시간 내내 책을 보던 키 큰 남성 그리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두툼한 책을 손에 들고 커피를 마시던 중년.
짐이 될 것 같아 챙겨가지 않은 종이책이 아쉬웠다. 전자책을 가방에서 빼내어 지문으로 눌러 밀어 페이지를 넘겼다. 한국에 돌아가면 언제나 종이책을 들고 다니겠노라 다짐했다.
해외에서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저렴하고 값싼 용지를 사용해서 한 손에 쥘 수 있는 크기의 페이퍼북을 만들어 판매한다. 내수량이 부족한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는 고품질 고가격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다. 책이 좀 더 작고 가볍다면 내 손도 책을 자주 잡게 될까.
국내선 방향으로 안내를 따라 짐을 부치고 소지품을 담은 작은 가방만 어깨에 멨다. 아침 일곱 시, 식당에는 아침을 먹는 이들로 가득하다. 주로 치킨과 베이컨을 사용한 샌드위치 가게에서 납작한 파니니와 커피를 사서 의자에 앉았다. 짭짤한 샌드위치를 씹으며 고개를 드는데 매장 벽에 멋진 글귀가 보인다.
“I DO BELIEVE ITS TIME FOR ANOTHER ADVENTURE"
“이제 또 다른 모험을 할 시간이에요.”
한 시간 반 동안 하늘을 날아 준 제트 스타 비행기는 기다란 고속버스처럼 푸근하면서도 시끄럽다. 저가 항공이지만 비교적 깨끗하고 편안하다. 식사를 주문한 이들에게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제공하는 승무원들의 모습도 친근하다. 튀긴 음식과 햄버거 냄새가 진동하면서 통로 옆으로 맛있게 아침을 먹는 덩치 큰 남성들이 수다를 시작한다. 이것도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발견과 모험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는데 멀리 바다 물결이 군데군데 튀어 오른다. 바닷속 검은 그림자의 움직임도 보인다. 끝없이 펼쳐진 대양을 위를 날아가는 작은 비행기 속에 앉아 모험을 준비한다. 비행기의 작은 꼬리가 드디어 푸른 육지 위에 걸렸다. 곧 멜버른 아발론 공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