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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과 단수, 당연한 것들의 값어치

카이로에서 시작된 삶 9

by Jina가다

하루 한두 번, 정전이다. 에어컨이 멈추고, 전등과 블루투스, 파라핀 기구도 조용해진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연결되기에, 이제는 그저 자연스럽게 기다릴 수 있다. 인샬라. (신이 원하신다면)

이틀에 한 번꼴로는 단수다. 빈 공기 소리만 내는 수도꼭지를 바라보게 된다. 그래도 매번 30분 안에는 해결되곤 했다. 처음엔 이집트 전체의 문제인 줄 알았다. 이 건물 아래층이 공사 중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아직은 이 나라 전체를 의심할 일은 아닌 듯하다.


밤 아홉 시 반, 갑작스러운 정전.

‘이번에도 5분이면 돌아오겠지.’

그런데 아니었다. 30분이 훌쩍 넘었다.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1층으로 내려가 관리인을 만나려 현관 밖으로 나갔다. 아고, 엘리베이터도 멈춰있다.

어두운 계단 여섯 층을 혼자 내려가기엔 분노도, 용기도, 간절함도 부족하다.

창밖을 보니 불이 켜진 건물도 있다. 아직 외출 중인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딸의 목소리가 건성이다.

“동네 전체가 그런 거니, 아니면 우리 건물만 그런 거니?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좀 물어봐줘.”

“나라 전체도 맞고, 그 건물도 맞고요.”

남편에게 전화하자 걱정이 먼저다.

“집을 잘못 구한 거 아니야?”

그리고는 덧붙인다.

“이곳은 뭐든, 인샬라~”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으니 조용히 기다린다.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면, 말고.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에어컨 돌아가던 소리가 멈추니, 창밖 사람들 목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개 짖는 소리도, 내 숨소리도 선명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오지에서 봉사하는 이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칠흑 같은 공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익숙한 동선대로 천천히 화장실을 찾았다. 언제 전기가 돌아올지 모르니 배터리가 남아있는 동안 무어라도 하면서 기다리자.

세면대 앞에 작은 빛을 세워두고 양치하고 세수를 마쳤다.

“어!”

전기가 돌아왔다. 순간 들어온 불빛에 집안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수건으로 얼른 물기를 닦고, 이 기쁜 소식을 가족에게 전했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눈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것처럼.


무엇이든 당연하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불편함 그리고 감사함.

빛, 전기, 물. 이토록 귀한 것이었는데. 너무 싸게, 너무 익숙하게 소비하니 귀한 줄조차 몰랐던 것 아닐까.

당연한 순간, 당연한 관계, 당연한 소유. 그 모든 것이 그저 자연스럽게 주어진 줄로만 알았다.

거리로 나가면 금세 매캐해지는 코와 목.

조금만 걸어도 온몸이 뜨거워지는 열기.

주변을 둘러봐도 익숙하지 않은 말과 이방인들뿐이다.

조금 불편해지자, 익숙했던 것들이 간절해졌다.

‘중복 말복이 다가온다는 시아버지 말씀대로 한국은 곧 가을이 오겠지.

근처 숲 많은 공원을 산책하는 친구는 맑은 공기에 큰 숨을 쉬겠지.

해외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동료는 익숙한 사람들 틈에 섞이겠지.’


정전과 단수 덕분에, 값없이 주어진 감사들을 하나씩 되짚는다.

영어를 알아듣는 현지인이 있어 감사하고,

근처 카페가 있어 따뜻한 라테를 마실 수 있어 감사하고,

한국어로 수다할 수 있어 감사하고,

전기세가 낮아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 수 있어 감사하고,

이집트 마트에서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살 수 있어 감사하고,

특히 오늘은 바람이 불어 감사하고.


내 마음에도 정전과 단수를 주의한다. 당연함을 ‘감사’로 바꾸고 나니, 살 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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