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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재료가 맘에 들어

카이로에서 시작된 삶 12

by Jina가다

일주일 동안 하루 한 번씩은 마트에 들렀다. 200파운드(약 육천 원) 면 다섯 종류의 과일을 두세 개씩 담아 올 수 있다. 아침과 저녁 식사마다 사과, 배, 무화과, 망고를 곁들이는 사치. 한국에서는 누리기 힘든 호사다.

햇빛이 번지는 도로에 나란히 자리한 ‘까르푸’와 ‘매트로’ 마트. 번갈아 들르며 식재료를 고르는 재미는 매일의 소소한 일과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만 원이 훌쩍 넘는 수박을 이곳에서는 오천 원이면 들고 온다. 품질이야 한국산만 못하지만, 칼끝이 닿으면 벌겋게 갈라지고 은 달다.

수박 철이 저물어가는 요즘은 과육이 퍼석해져 맛이 덜하다. 대신 망고가 풍성하게 나올 때가 곧 온다고 알려준 한국인 할아버지. 영국에서 대기업 고위직으로 일하다 은퇴 후 손자를 돌보러 이집트에 왔다는 점잖은 분을 알게 되었다. 2년 넘게 이곳에 살며 얻은 생활 정보를 몇 가지 건네주었다.

한국 매생이와 비슷한 식재료 ‘몰루키야’는 마트 냉동 코너에서 찾을 수 있고, ‘코샤리’라는 전통 서민 음식이 맛있는 식당도 알려주었다. 다음번에는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달라 요청했다.


아직 전통시장은 가보지 못했지만, 가까운 마트만으로도 구경거리가 넘친다. 문을 열면 가장 먼저 과일 코너로 향한다. 종류가 다섯 가지 넘는 사과, 손에 딱 잡히는 납작 복숭아, 금세 터질 것 같은 무화과, 속 빨간 자두, 바구니 가득 넘치게 쌓인 여러 가지 망고, 주렁주렁 포도.

무게를 재고 가격표를 붙이는 동안, 골드 로즈 사과의 은은한 향이 코끝에 스친다. 갈 때마다 네다섯 개씩은 꼭 담는다.


야채 코너에서는 토마토와 아보카도, 작은 오이, 적양파, 양상추를 챙겨 매일 샐러드를 만든다. ‘라이문’이라 불리는 작은 초록빛 레몬은 잘라 두었다가 레몬수를 만들어 마신다. 신선한 야채로 오후의 열기를 달랠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진열대는 끊임없이 쏟아내는 이집트 땅의 풍성함을 자랑하는 듯하다.


이틀에 한 번은 밥을 한다. 빵이 저렴하고 맛있어 샌드위치도 자주 만들지만, 이집트산 쌀로 지은 밥은 한국 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쌀 코너에는 동남아에서 보았던 기다란 쌀부터 한국식 쌀, 현미까지 갖췄다. 다양한 브랜드가 진열대 한 면을 가득 채운다.


이곳은 나일강이 만든 기름진 땅. 긴 일조량과 따뜻한 기후 덕분에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농작물을 기른다. 어떤 과일은 1년에 두세 번씩 수확한단다. 강과 오아시스를 잇는 수로 위에 전통 농법과 현대 농업이 공존한다고 한다. 유럽과 중동으로 과일과 채소를 대량 수출한다는 이 나라. 그 품질과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보태겠다.


흔하디 흔한 오렌지, 석류, 무화과, 바나나, 포도, 대추야자를 마음껏 고를 수 있는 마트. 이제는 나만의 익숙한 놀이터가 되었다. 유제품 코너에서는 요구르트와 허브 치즈를, 고기 코너에서는 신선한 소고기를 고른다. 향신료와 절임 반찬 코너는 아직 눈으로만 구경하지만, 언젠가 하나씩 시도해 볼 테다.


혼자서 저울을 쓰고 가격표를 붙이려면 식재료 이름부터 익혀야겠네.
“망가(망고), 모즈(바나나), 부르투알(오렌지), 이 넵(포도), 투페흐(사과), 룸만(석류)…”
오늘도 나일강의 축복이 담긴 과일과 채소를 카트에 담으며 이곳에서의 시간을 천천히 익힌다.


한국의 장바구니보다 가볍지만, 그 안에 새로운 언어와 풍경 그리고 나만의 계절을 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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