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자버렸다
자, 앞으로는 새벽 4시에 기상이다. 라는 규칙을 정한 게 바로 어제였다. 밤 아홉시가 넘어가도록 별로 피곤하지 않았다. 여느때와 같이 네시 반에 일어났고 게다가 낮잠도 한번 안 잤는데. 시간이 지나갈 수록 불면의 조짐에 걱정이 몰려들었다. 열 시부터 침대에 누웠지만 정신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커피를 끊었다가 오랜만에 진하게 한 잔 다 마신게 화근이었다. 누운 지 삼십분쯤 지났을 때 그냥 일어나버렸다. 가벼워 휴대성이 좋지만 그만큼 쉽게 휘어져버리는 고무와 같은 물성, 그것이 내 정신의 특장점이랄까. 포기가 빠른 편이다.
그래도 늦어도 한 시면 잠에 들 것이라 생각했다. 거실로 나왔을 때, 남편은 TV에 공상과학 미드를 틀어둔 채 미국 선물시장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모니터링이라고 하니 뭔가 그럴듯할 것 같지만, 실상은 손바닥보다 작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서 소파에 누운 채 그래프를 봤다가 뉴스를 읽다가 하는 모양새다. 눈, 경추와 척추 건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소파의 반대편 끝에 누워 스탠드를 켜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다시 읽었다. TV 속에서는 도시 싱크홀에 빠져 만년 전 시간에 갇혀버린 성별, 나이, 인종이 다양한 미국인들이 합심하여 만년 후의 도시로 돌아갈 궁리를 하고 있다. 서로 말다툼도 하고 용기도 북돋다가 연애도 하고 그러는 것 같다. 남편은 핸드폰과 TV를 번갈아 보다가, 사십대 초중반 남녀가 끌어안고 있는 장면에서 "아이고 남편 왔는데 계속 바람 피우고 있네"라며 탄식을 내뱉았다. 만년 전으로부터 찾아온 남편을 마주친 여자는 안도한 것 같기도, 당혹해 하는 것 같기도 해 보인다.
고양이 두 놈도 각자 양쪽 소파 등받이 위에 식빵을 굽는 모양으로 앉아있다. 이것이 매일의 늦은 밤 거실 풍경이겠거니 싶어, 아주 희미한 소외감마저 느껴진다. 내가 혼자 외롭게 자는 동안 니들은 밤마다 소파에 모여 정겹게도 지내는구나.
이제 좀 잠이 오나 싶었을 때는 벌써 새벽 세시 반을 지난 시각이었다. 4시 기상 계획과 아침 요가는 어떻게 할 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 네시에 알람이 울렸다. 네시 삼십사 분쯤 놀랍게도 그냥 눈이 떠졌다. 요가를 가려면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그냥 자기로 했다. 비겁하기는 하지만, 심각한 수면부족 상태로 요가 동작을 취하다가는 부상을 당할수도 있다, 고 생각하면서.
8시에 일어나 고양이들 밥을 줬다. 화장실을 치우고 물그릇을 갈아주었다. 물 한잔에 브로멜라인과 퀘르세틴을 먹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다시 읽었다. 뭔가 뜨뜻한 것이 먹고 싶어 냉장고를 열어보니 양파 반개, 팽이버섯과 두부가 눈에 띈다. 다시팩을 넣고 낸 국물에 양파, 팽이버섯, 두부를 넣고 된장국을 끓여 먹었다. 다 먹어갈즈음 남편이 출근 준비를 시작하기에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아주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요가원을 땡땡이쳤다고 해서 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왜 하루도 빼먹고 싶지 않은지는 알 수 있게 됐다. 아직 정식으로 하루가 시작되지 못했다랄까, 개운치 않은 느낌. 그렇지만 낙담하지는 말고 매끄럽게 유턴하자.
새벽 네시, 글쓰기, 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