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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몽당연필 Oct 27. 2022

27화. 세상에 재밌는 게 이렇게 많다니!

소소한 취미로 중독에서 헤어 나오다

 오전 글쓰기와 오후 산책이 어느 정도 습관화되자(키친 드링커 26화 참고) 유용한 일이든, 무용한 일이든 도장 깨기처럼 하나씩 도전해 보기로 했다.

 

 ‘소소한 성공 경험 속에서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 목적이므로 도전 목록에 오르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평소에 호기심이 있었던 일일 것,

 둘째, 도중에 흥미를 잃으면 그만두어도 상관없는 일일 것,

 셋째,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겠다는 비장한 각오 따위는 하지 말 것.


 1. 피아노 연주하기

 집안을 빙 둘러보니 뽀얗게 먼지 쌓인 피아노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곱 살에 시작해서 6~7년 정도 배웠던가. 손끝이 수십 년 전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다운로드해서 출력한 악보를 보고 더듬더듬 치기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가요 한 곡(태연의 '만약에')과 영화 주제곡 한 곡('포레스트 검프' 주제곡)을 들을 만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아들은 내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연주가 끝나면 활짝 웃으며 물개 박수를 쳐주었다. 박수 속에 엄마를 향한 응원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때 피아노에 흥미를 느낀 7세 아들은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반년 만에 샵(#)이 네 개가 들어간 악보를 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아이는 부모를 보고 배운다.)


 2. 가드닝(gardening)과 페인팅(painting)

 다음 도전 종목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었던 ‘홈 가드닝’.

 초보자도 쉽게 키울 수 있다는 선인장과 스투키마저 내 손에서는 오래 못 가 죽어 나간 기억 때문에 식물을 멀리했었는데, 이젠 끌리면 무조건 해 보는 거다!

 하루아침에 화원에서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긴 형형색색의 꽃들은 다행히 생생한 생명력을 이어가며 내가 쏟은 애정에 보답했다.


 그림이라고는 초등학교 때 그린 '불조심 포스터'가 전부였는데, 꽃을 키우다 보니 주제넘게 꽃을 그려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스케치가 되어 있는 '컬러링 북'을 구입해서 수채 물감으로 쓱쓱 꽃잎을 채워 넣었다. '그리기'가 아니라 '색칠하기' 수준이었지만, 색의 조합에만 신경 쓰면 되는 그 몰입의 순간은 황홀하기까지 했다.

 '가드닝'과 '페인팅'을 통해 색채가 심리 치유에 주는 놀라운 효과(color therapy)를 몸소 체험했다.


 3. 반려 동물 키우기

 이웃에게 부탁하여 달팽이 알을 받았다. 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화했고, 아기 달팽이들은 나도 자주 못 먹는 '금(금값 상추)'를 매일 서너 장씩 먹어 치우며 어느새 엄지손가락만 하게 자랐다. 달팽이 알이 서른여섯 마리의 장성한 달팽이가 되는 장면은 내 시나리오에 없었기에 채집통을 들여다볼 때마다 당혹스럽지만, 하얀 안테나를 뾰족 세우고 오물오물 상추에 구멍을 내는 녀석들을 보면서 묵직한 책임감을 느낀다. (달팽이를 주신 이웃은 식용 달팽이라며 마음만 먹으면(!) 개체 수 조절이 가능하다고 귀띔해 주었다..)


 큰일이다... '중간에 그만두어도 상관없는 일'이라는 두 번째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고 달팽이를 덜컥 들여왔으니.


 4. 영어 공부

 블로그를 통해 영어 공부를 함께할 사람을 모집했다.  사는 지역도, 나이도 다른 네 명이 모여 매일 아침 EBS 라디오 교재로 40분 동안 영어 공부를 한다.  아침마다 잠옷 차림에 눈곱도 안 뗀 상태로 온라인 회의실에서 마주하다 보니 정이 깊게 들었다.

 2주 정도 단기로 계획한 공부 모임은 어느덧 10개월째에 접어들었다. 어제 배운 걸 오늘 잃어버리는 날이 반복되지만,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는 그 따뜻한 느낌에 중독되어 이제 와서 모임을 중단할 수가 없다.


 5. 자격증 따기

 생계나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재미'로 도전해서 '정리수납전문가 자격증'과 '타로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땄다. 내가 배운 내용으로 살림을 정돈하고, 지인들의 성향을 분석하고 미래를 점쳐주었다(물론 무료로!).

 우울을 딛고 웃음을 찾아준 것만으로도 그 쓰임을 다한 고마운 자격증들이다.




 재미있을 것 같은 일만 찾아 하기에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데, 술과 함께 무의미하게 흘려버린 시간을 합하면 대체 몇 년일까.

 

 후회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에서 '취미 중독자', '기쁨 채집가'가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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