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세상을 잇는 사람
“아빠는 일할 때 누구 편이야? 기업? NGO?”
가끔 너는 정말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던지지.
그날도 그랬어. 갑자기 툭, 마음 깊은 곳을 찌르는 말.
나는 잠깐 짬을 내어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고,
너는 TV에서 흘러나온 NGO 협업 광고를 보며 무심히 말했지.
“저거 아빠가 하는 일이랑 비슷한 거야?”
그 말 뒤에 곧바로 따라온 질문이었어.
“근데 아빠는 누구 편이야? 기업이야, NGO야?”
처음엔 웃으면서 넘기려 했어.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박혀서
그날 밤까지도 자꾸만 떠올랐단다.
‘그래, 나는 누구의 편이지?’
사실 이 질문은 너가 처음 던진 게 아니야.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어.
2년 전쯤, 지방의 어느 중소기업에서 강연을 마치고 나온 날이었어.
회의실을 나서는데, 부장님 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정중하게 물으셨어.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기업은 왜 꼭 NGO랑 뭘 해야 하죠?”
그 질문은 예의 바르면서도 날카로웠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기업인으로서의 실질적인 물음이었지.
‘왜 이 회사가, 왜 지금 이 일을 해야 하느냐’는
진짜 이유를 묻고 계신 거였어.
나는 그 자리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브랜드 이미지, 공익적 가치 같은
그럴듯한 말을 꺼낼 수 있었지.
하지만 정작 마음 속에선
그 질문에 대한 ‘진짜 대답’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걸 느꼈어.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이 일을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단다.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나는 늘 두 세계를 오갔어.
기업은 실질적 성과, 브랜드 메시지, 실행 가능성,
그리고 고객의 반응을 중요하게 여겨.
NGO는 사연의 진정성, 구조적인 문제,
더디지만 꼭 필요한 변화에 집중하지.
각자의 세계에서 너무나 중요한 가치들이지만,
이 둘은 너무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어.
처음엔 그런 차이가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틈 사이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보였어.
기업 담당자는 실적과 보고서 사이에서,
NGO 활동가는 예산과 현실 사이에서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피곤해하고 있었단다.
나도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어.
‘왜 이 둘은 늘 이렇게 어긋날까?’
‘서로 다르게 말하는데, 왜 자꾸 같은 일을 하려 할까?’
이런 질문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질문이 생겼어.
‘그럼 이 두 말을 번역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다름을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바로 아빠가 계속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야.
그리고 그 질문이
지금 아빠의 일 전체를 설계하게 만든 출발점이기도 해.
그날 이후로,
아빠는 혼자 작은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어.
처음엔 단순했지.
‘기업은 이런 걸 원하고, NGO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그걸 잘 정리해서 맞춰주면 되는 줄 알았어.
하지만 점점 알게 되었지.
그건 단순한 중간자의 역할이 아니었어.
한쪽은 ‘성과’를, 다른 쪽은 ‘의미’를 원했어.
기업은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지금 여기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고 있었고,
NGO는 오랜 시간 쌓인 문제를
‘긴 호흡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
이걸 단순히 맞춰주는 것으로는 부족했어.
이해하고, 번역하고, 조율해야 했어.
그래서 아빠는 하나의 구조, 하나의 언어 체계를 만들어 보기로 했단다.
그 언어 체계는
기업의 목표를 단순히 마케팅 수단으로만 바라보지 않으면서도,
NGO의 활동을 막연한 ‘좋은 일’로만 포장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기준이었어.
이름도 없이, 정식 등록도 안 된 그 구조는
처음엔 A4 한 장짜리 메모였고,
그다음엔 슬라이드 몇 장짜리 흐름도였어.
지금은 수많은 고민과 각자의 스토리를 묶는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명확해지고 있어.
기업이 궁금해하는 질문에
좀 더 명확한 언어로 대답할 수 있도록 돕고,
NGO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기업 안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설계하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그 둘 사이에서 ‘사람’을 잊지 않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어.
아빠가 만든 그 틀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명칭도, 공식적인 등록도 아직 안 되어 있어.
하지만 그 안에는
아빠가 지난 10년 넘게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걸어온
수많은 실패와 성공, 실망과 희망이 녹아 있단다.
사실 기획자라는 일은
아직 사회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도 않아.
누군가에게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일’처럼 보이기도 하지.
아직 사회적으로는 '기획자'라는 단어 외에는
명확한 직군의 분류도 없고,
당장 눈앞에 보여지는 성과는 없지만
아빠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어.
이 애매함이야말로
누군가 꼭 서 있어야 할 자리라는 걸 말이야.
사람들은 종종 아빠에게 물어.
“기업 쪽이에요? NGO 쪽이에요?”
아빠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저는 둘 사이에서 길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길은 때로 강연이 되고,
어떤 날은 슬라이드 한 장이 되고,
다른 날은 그저 한 사람의 고민을 오래 들어주는 시간이 되지.
보여주기 위한 일이 아니라,
정말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설계를 하는 것.
그게 아빠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야.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조금씩,
기업과 NGO 사이를 잇는 새로운 길을 만들어오고 있어.
그래서, 너가 그날 물었을 때
아빠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어.
“아빠는 사람 편이야.
세상을 더 잘 이어가고 싶은 사람들의 편이지.”
이 말이
어렵고 복잡해 보일 수도 있어.
하지만 언젠가 네가 더 자라서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될 때가 오면
이 말의 의미를 더 깊이 알게 될 거야.
사람과 사람, 세상과 세상을 잇는 일.
그건 화려하진 않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걸 말이야.
“세상과 세상 사이에,
누군가가 길을 만들고 있다는 걸
너도 기억해주면 좋겠구나.”
다음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게.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좋은 일”이라는 표현이
현장에서 얼마나 복잡한 질문을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 무게를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를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