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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Sep 01. 2023

야나할머니와 어죽

뜨끈한 어죽이 생각나는 날

"계세요"


대문 밖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쏜살같이 나가보니 마당엔 가겟방 옆집에 사는 시복이 오빠가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빠깨스를 들고 서 있었다.


"오빠 왜에?"


"집에 어른들 안 계시나?"


"아니 할머이 있는데. 할머이~"


나는 목청이 떠나가라 할머니를 불렀다.


"누가 왔나? 안으로 드오지 왜 밖에 서서 그러니라고"


대문간으로 걸어 나오시는 할머니를 보고 시복이 오빠는 이마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제가 오늘 강에 가서 낚시를 했는데 많이 잡아서 좀 드리려고 왔어요"


"강에까지 가서 물괴기를 잡았다고?"


할머니는 오빠가 수줍게 내민 빠깨쓰를 받으셨고 그 안길쭉하고 허연 배에 까만 눈동자를 가진 물고기가 비린내를 풀풀 풍기며 가득 담겨 있었다.


"옴마나 니가 이걸 다 시로 잡았다고? 니 먹지 힘들게 잡은걸 이래 마이 주노?"


"아침부터 잡았는데 오십 마리도 넘게 잡았어요. 집에도 많이 있으니 할머니 요리해서 드세요"


"그래 고맙데이. 근데 첨 보는 물괴기다. 야는 이름이 뭐라드나?"


"강에 어른들이 준치라고 하대요"




할머니는 오빠가 통째로 주고 간 빠깨쓰를 수돗가로 들고 가 시원한 물이 담긴 대야에 쏟아 부셨고 준치에게서 떨어진 작고 얇은 비늘들이 수돗가를 반짝거리는 왕궁처럼 만들었다. 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수돗가 지정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나무도마에 생선을 올려놓고 배를 갈라 손질을 하셨는데 내장과 아가미, 꼬리를 떼어 바가지에 툭툭 던져 담으시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칼 등으로 준치 등을 벅벅벅 소리 나게 긁어 주셨다.


"니 이 바가지 쏟지 말고 들고 가서 거름티미 파가꼬 잘 감추고 온네이"


"개나 고냥이가 못 파게 깊게 파묻고 오면 되는 거지?"


"오이야"


할머니가 내 대답을 듣고 틀니를 드러내고 웃으셨다.


"할머이 이제 이거로 뭐 만들어?"


"뭐 맹글긴 녁 맹글지"


할머니는 마당 구석에 걸쳐 있는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지피셨고 마당엔 익숙불쏘시개 솔잎 타는 향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손질 뒤 배가 날씬해진 준치 열다섯 마리를 솥 안에 넣으시고 청양고추 몇 개와 통마늘 한 줌 그리고 담벼락 밑에 자라고 있던 차조기 잎도 따서 넣고 굵은소금을 한 줌 뿌리시더니 냄비 뚜껑을 닫으셨다. 장작불은 모기도 쫓고 파리도 쫓으면서 활활 타올랐고 마당서 쫓겨간 파리떼들과 똥파리들이 운동회를 하는지 수돗가에선 계속 왱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이 얼마큼 기다려야 이거 먹을 수 있어?"


"이 잠꾸래기 벌써 잠이 올라하나? 눈 크게 뜨고 불 잘 지키고 있으야 한 술 뜨고 잔데이"


열심히 일한 빨간 장작 덕분에 냄비 속에선 금세 물 끓는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려왔고 뚜껑이 들썩 거리며 하얀 김이 빠져나왔다. 나는 장작을 깔고 앉아 멍하니 구경을 하다 살짝살짝 졸고 있었고 이따금씩 할머니 흉내를 내 듯 부지깽이로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불씨들을 아궁이 안으로 밀어주었다. 내가 불을 감시하고 있는 사이 할머니는 부지런히 뒤꼍에서 부추를 한 줌 뜯어와 다듬으시고 씻어 쑴벙쑴벙 썰어 양푼에 담아 놓으셨다.




광에서 스댕 다라를 꺼내 수돗가에서 헹군 할머니는 철망으로 된 채를 담아 오셨고 드디어 산신령이 나올 것 같은 김을 뿜으며 냄비 뚜껑이 열렸다. 준치 삶긴 냄새는 그냥저냥 생선 냄새 같았지만 입맛을 다시게 하는 아주 썩 맛있는 냄새는 아니었다. 나는 김이 덜 올라오는 곳을 찾아 자라처럼 목을 길게 빼고 펄펄 끓고 있는 냄비 속을 들여다보았고 거기엔 준치들이 하얗게 익어 있었다. 할머니는 손잡이가 달린 소쿠리로 냄비 안에 있던 준치와 야채들을 모두 퍼내 채안에 담으시곤 국자로 냄비안에국물을 퍼내어 뿌려주시면서 생선살을 채 밑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셨다.


"할머이 왜서 그렇게 해?"


"왜긴 물괴기가 까시가 많아 그라지"


처음엔 덩어리였던 살점은 국자의 안마와 국물의 마사지에 알뜰하게 발라져 부서졌고 할머니는 스댕 다라 안으로 고여진 생선살과 국물들을 조리로 몇 번 더 걸러주셨다. 그렇게 생겨난 뽀얀 국물은 솥 안으로 텀버덩 소리를 내며 다시 부어졌고 된장과 고추장, 고춧가루와 찐 마늘을 넣고 끓인 뒤 아욱과 부추를 고 휘휘 저어 놓으셨고 점점 힘이 빠져가는 빨간 장작과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나는 밭에서 돌아오실 아빠와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글보글 어죽

"오늘 저녁은 어죽이래요?"


밥상에 앉으며 아빠가 놀라 말씀하셨다.


"오늘 낮에 시보이가 강에 가서 물괴기를 잡았다고 이래 주고 갔지 모나"


"가가 강까지 어째 가서 이걸 잡아 왔대요?"


"아빠 시복이 오빠가 친구랑 자전거 타고 강까지 가서 낚시로 준치를 오십 마리도 넘게 잡았대"


나는 아까 오빠한테 들은 말을 마치 내 자랑처럼 밥상에서 신이 나 떠들었다.


"요새 준치가 마이 잡힌다 소문이 자자하더니, 고생은 좀 했어도 준치를 오십 마리나 잡았으면 손맛은 좋았겠네"


아빠는 호호 불며 어죽을 드셨다.


"으윽 나 이거 안 먹을래"


"지녁 심부름 다 해놓고 와 안 먹나? 어여 더 무봐"


"이거 너무 맛이가 엄써"




도리도리 뱅뱅

흰 눈이 펄펄 내리던 날 입대를 했던 큰 아이는 18개월의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8월의 전역병이 되었다. 돌아오는 명절 때마다, 돌아오는 생일 때마다 허전함과 아쉬움으로 기다리셨을 할머니를 뵈러 시골로 향했고 전역기념 별미로 할머니 동네서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더니 예상치도 못하게 나온 대답은 '어죽'이었다.


"너 어죽 한 번도 못 먹어봤잖아. 근데 어떻게 그게 먹고 싶어?"


"아빠가 지난번에 태용 아재하고 어죽 드셨는데 맛있다고 하셨던 게 기억에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 도리뱅뱅인가? 그거 하고 어죽이 나온 걸 는데 뚝배기담긴 것이 맛있어 보였어요. 군 생활하면서 입맛이 달라진 게 있다면 뚝배기에 주는 국밥이 좋아진 거 같아요"


"그거 니가 훈련소 들어가기 직전에 먹은 음식이 국밥이어서 위로 음식이 된 거 아닐까?"


"그럴까요?"


"위로 음식이 아니지. 나라면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음식일 거 같은데. 음식만 봐도 다시 입대해야 할 거 같잖아"


지금도 어쩌다 재입대하는 꿈을 꿨다고 치를 떨며 말하는 남편. 그래서 남편에게 아들의 군생활과 전역은 군생활 선배로서 아비로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고, 반가움과 안도감이 퐁퐁 넘치는 흐뭇한 눈으로 손자를 바라보는 할머니와 아들 덕에 도리뱅뱅을 덤으로 먹게 된 아버지, 그리고 자정을 넘어 진정한 민간인이 된 큰 아이와 함께 어죽과 도리뱅뱅을 맛있게 먹었다.




어릴 적 먹었던 준치 어죽은 시복이 오빠와 할머니의 정성 대비 맛은 정말 없었다.

그땐 몰랐지만 더 커서 알게 된 것은 준치라는 생선 자체가 맛이 다 했다. 얄궂게도 가시는 또 어찌나 많고 억센지. 시복이 오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떠나고 나와 동네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강까지 진출(?)하게 되었을 무렵에 친구들도 줄낚시로 팔뚝만 한 준치를 잡았는데 친구들은 준치를 가지고 오지 않고 강가에 버리고 왔고 나는 친구들이 내 몫이라며 건넨 준치를 자전거에 싣고 와 할머니를 가져다 드렸는데 할머니는 준치를 토막 내 작은 냄비에 끓인 다음 숟가락으로 살살 살을 발라내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은 검둥이에게 갖다 주셨다. 근데 나의 기억이 온전히 맞는진 헷갈리지만 그날 검둥이도 준치를 썩 성의 있게 먹지 않았던 것 같고할머니가 검둥이를 보며 걱정스레 하셨던 목소리가 남아있다.


"마이 뭇나. 니가 마이 무야 니 새끼 젖 안곯구지"


그리고 그 무렵 동네엔 강아지 질병이 돌았고 검둥이는 여섯마리의 새끼를 모두 잃었다.




폴폴 김이 나는 어죽 속에 있는 소면을 건져 먹으며 잠깐 생각했다. 그때 밥 말고 국수를 넣어 먹었다면 준치 어죽을 좀 더 맛있게 먹었을까? 그리고 몇 번을 쉬다 달리다를 반복하며 터질 듯한 종아리를 달래 가며 자전거를 타고 그 먼 강까지 가서 잡은 준치를 아낌없이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준 시복이 오빠가 참 어른스럽고 고마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오빠도 나도 이제는 같은 중년이 된 것도 생각해 보면 참 우습기도 하고.


언제나 주변의 재료와 어진 재료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가족들을 배불리 맛있게 먹이고 싶어 하셨던 할머니의 그 작은 손을 통해 만들어지던 먹거리들을 생각하면 손가락만 까딱해도 배달이 오고, 엎어지면 코 닿을 데가 마트인 환경서 살고 있는 게으른 주부인 나는 부끄럽기 짝이없다.




곧 다가올 금초행에 우리 가족은 또 어죽과 도리뱅뱅을 먹기로 했다. 뜨끈한 어죽 먹고 힘내서 주책같이 큰 아카시아 나무들 톱질도,  잔디도 많이 많이 쓸어내야지. 그리고 아버지와 막냇동생 손길에 야나할머니 산소에 삐쭉빼쭉 잔디도 가지런히 정리될 것을 그려본다.


덥다 더워를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한바탕 비가 내리고 늘어난 밤의 연주자들의 음악회 소리와 남편의 이불을 잡아끄는 나를 보며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을 느낀다. 절기라는 것이 새삼 신기하고 오묘하다는 놀람을 금치 못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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