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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바라기 Aug 15. 2023

야나할머니네 고추 따는 날

40년 만에 찾은 적성


"야야 얼른 아침 묵고 내랑 꼬치 따러 가재이"


"할머이 나는 꼬추 따는 게 세상에서 젤 싫어"


"이잉 빨간 것만 똑똑 따믄 을매나 재미진데"


"꼬추는 어린이날 심는 것도 싫고 여름방학 마다 따는 것도 싫어. 모기새끼 난리고"


"그라니 모개이 안 달라붙게 긴 쓰봉에 긴 우와기 입고 양말 신꼬"


고추를 따지 않을 핑계를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고추를 따러 나가야 다.




비료 포대를 하나 질질 끌면서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차라리 고추밭이 멀기나 하면 다리 아파 멀어서 못 간다는 핑계라도 있겠구만 하필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 할아버지 산소 앞에 있는 밭이다. 아빠랑 엄마는 새벽부터 덕문이네 배추밭으로 품앗이를 가셨고 할머니와 나는 따고 돌아서기 무섭게 익어가는 붉은 고추를 따야 하는 전쟁 같은 운명과 마주했다.

그 시절 발도 들여놓기 싫었던 고추밭

"야야 거름이 좋아 그라나? 느 애비가 모종을 잘 키워서 그라나? 올해는 병도 읍고 우째 이래 꼬치가 잘 달리고 익었노"


할머니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똑 똑 소리를 내며 따지는 붉은 고추를 비료포대 안에 차곡차곡 채우셨다.


"야야 꼬치 꼭대리 안 달아나게 따야 된데이. 그래 힘으로 싱가지껀 잡아땡기믄 가지 찢어져 꼬추낭구 매해지니 땡기지만 말고 꼭지를 살살 돌리"


"할머이 잔소리 좀 그만해. 시꾸루와 죽겠어"


"이 마한 것 시꾸룹긴. 그 말대답할 시간에 꼬치 한 개라도 더 따겠네"


나는 힘으로 푹푹 잡아당겨 초록색 모자를 잃어버리고 하얗게 꼭지가 떨어진 허퉁머리 고추를  비료포대 안으로 성의 없이 집어넣었다.




진짜 돌아서면 익는다더니 거짓말이 아니었어 ^^

"할머이 언제까지 딸 거야? 설마 이걸 다 딸건 아니지"


"비온다카이 씨벌다 따야지"


"우리 둘이 이걸 어떻게 다 따? 나 다리도 아프고 모기새끼들도 마이 뜯어 개루와 죽겠어. 파리도 자꾸 눈 파먹을라고 앵앵 거리"


"이 마한 것. 오늘 꼬치 따는 일꾼 하긴 글렀네. 꼬치모 안 뿌라지게 고래살살 나가가꼬 집에 가서 미싯갈 한 사발 타온 내이"


나는 입가에 스며든 웃음을 애써 감추며 바로 어지면 닿을 데 있는 집으로 폴짝폴짝 깨금발을 뛰며 들어갔다.




"이 마한 것. 꼭대리 떨구지 말고 시뻘건 꼬치따랬더니 시퍼런 것도 다 땄네"


마당에 펼쳐 놓은 갑바 위에 오전에 딴 고추를 펼쳐 널으며 할머니가 혀를 차셨다.


"거다 냅두믄 뜨구와서 지도 익겠지"


"마한 것. 말이나 못하믄"


할머닌 내가 고추를 따다 떨어트린 파란 고추를 손으로 뚝뚝 분지르고 쪼개 씨를 털어내시곤 쌈장에 콕 콕 박아두셨고 물만밥에 우물우물 점심을 드셨다. 그렇게 한 숟가락을 뜨시곤 누워 뒹굴거리는 나를 부르지 않고 조용히 고추 밭으로 나가셨고 나는 느티나무 아래 들마루 위에서 오후 내내 낮잠을 잤다.




홍고추 작업 중

몇 주전 친정에 가려고 계획했지만 폭우로 인해 산사태에 인명사고 뉴스를 접해 놀란 엄마는 아무 데도 가지도 오지도 말고 꼼짝 말고 집에 가만히 있으라는 지령을 내리셨다.

나도 시뻘건 황톳물이 지하도를 삼켜버리고 산사태가 일가족과 마을을 삼켜버린 안타까운 뉴스를, 혹여나 추가 구조소식이 있진 않을까? 간절한 맘으로 하루종일 무한 반복 뉴스를 보며 혹 친정 마을에도 물난리나 산사태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고 감사히큰 피해 없이 지나가 주었다.

그리고 진짜로 친정 나들이를 다시 시도했고 동이 트기도 전에 출발해  뜰 무렵 도착해 보니 현관문도 잠기지 않은 채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드르륵드르륵


"여보세요"


"엄마 새벽부터 어딜 가신겨?"


"어디긴 밭이지"


"벌써 밭엘 가싰다고? 아침은 드셨고?"


"벌써라니 우리 아침 먹고 나온 지 한 시간도 넘었는데"


"엄마 근데 어느 밭으로 가신겨?"


"고추밭"


"하하하 오랜만에 엄마랑 스무고개를 하겠는데. 올해 내가 고추 심으러 오지도 않았는데 고추밭이 어딘지 어떻게 알아?"


"보면 모르나 척하면 알아야지"


엄마랑 통화를 하며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밭으로 걸어 나가니 밭 중간쯤서 작업을 하고 계시던 엄마가 일어나셨고 나는 그제야 고추밭이 이 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다리에 끼는 간이용 의자를 엉덩이에 혹처럼 달고 고추 밭으로 들어서자 안개가 걷히면 땡볕에 얼굴이 그을린다며 아버지가 파라솔을 설치해 주셨다.


"아빠 나는 쓰나 안 쓰나 까만 건 매한가지라 아빠 쓰시"


"이게 그늘이 져서 생각보다 시원해. 일 안 하다가 하믄 더위 먹어"


나는 아버지가 펴주신 파라솔을 쓰고 홍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우와 올해 고추 농사가 풍년이네. 태풍도 피해 가고. 엄마랑 아빠 일할 맛 나시겠는데"


시뻘건 고추밭이랑에 앉아 건너편 이랑서 작업 중인 엄마한테 우렁찬 목소리를 보냈다.


"일할 맛만 나.  사람들도 구경 오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어떻게 이렇게 잘 키웠냐고 품종이 뭐냐 묻고 사진도 찍어 가고 그랬는걸"


"엄마 이건 건조하려고 는 거야 아님 생고추로 내려고 하는 거야?"


"공판장에 생고추로 낼 거여. 그래서 이래 급하게 따자네"




고추밭에서 잠깐 같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언니와 동생들 가족들도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고 조용하던 산골 마을의 우리 집엔 갑자기 일꾼들이 넘쳐나 시끌벅적하게 되었다.


"늬들 이것 좀 도와다오"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버지가 미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요청하신 일은 총알처럼 쏟아져 내린 비에 흙탕물 땡땡이 도장을 찍은  홍고추를 한 개 한 개 닦고 쭉쭉 곧게 뻗은 녀석들만 골라 놓는 일이었는데 우리가 일사불란하게 선별하 아버지는 박스에 차곡차곡 홍고추들을 가지런히 담으셨고 무게를 재고 포장을 끝내는 일은 신속하고 시원하게 끝이 났다. 나는 20킬로 16박스가격도 잘 받고 아버지 이름표를 달고 출하되는 이 홍고추를 사서 드시는 소비자가 기분 좋고 만족하게 드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무게가 넘쳤지만 몇 개씩 으로 더 담았다.




솔직히 작년까지만 해도 고추를 따는 일은 내게 정말 벌 같은 일이었다.

좁고 더운 이랑에 쪼그리고 앉아 긴긴 시간을 고추와 모기와 파리랑 싸우다 보면 짜증지수가 스멀스멀 올랐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개구리나 거미를 보고 화들짝 놀라기라도 하면 고추 따는 일은 더더더하기 싫은 일이었는데 사람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나도 변하나 보다. 이번엔 집중해서 고추를 따는 일이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초록과 빨강의 조화도 아름다웠으며 다시 만난 개구리와 거미도 어쩜 이리 반가운 것인지. 게다가 태풍과 폭염으로 인해 모기도 가족 늘리기에 실패했는지 아디다스 풀모기의 공격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미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모인 형제들과 함께 도란도란 얘기하며 배꼽 잡고 웃으며 일하다 보니 일은 금세 마무리가 되었고 그런 우리를 보며 흐뭇하게 일하시는 부모님을 뵈니 정말 긴 하루를 야무지게 보내고 있다는 만족감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고추 따는 거랑 선별 작업이 적성에 맞는 거 같애. 귀촌도 괜찮을 듯. 이 단순 작업 이게 주는 행복감이 있네"


"히야~ 누나 어렸을 때부터 고추 따는 거 그래 질색하더니 진짜 변했네. 그래도 나는 아직도 고추 따는  싫어. 차라리 소똥 치는 게 낫지"


막냇동생이 홍고추 상자를 차에 실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여. 그렇게도 싫던 일이 좋아진 걸 보면 사람 변하긴 하나 봐"


"어 사람 변하면 죽을 때 된 거라고 했는데"


남편의 말에 내가 눈을 흘기며 세척하려고 분리해 둔 고추를 한  집어던지자 남편이 웃었다.


"그렇지 그게 왜 안 날아오나 했다."


하하하 나는 남편 손바닥 안에 있는 건가? 남편에게 나는 절대, 슬마, 변하지 않는 사람인가 보다.

하기사 나도 40년 만에 찾은 나의 적성이 퍽 당황스럽긴했다.




할머이~ 미안해. 그때 좀 더 성의 있게 할머이 도왔으믄 할머이가 쫌 덜 힘드싰을낀데...

할머이 산소가에 꽃이 한가득 피어 있어서 마한 것 할머이가 더 보고 싶어 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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