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네 붉은 마당 이야기

에취 매운 내

by 별바라기

지나간 추석 연휴의 한 날 마당에 나갔던 나는 갑바위에 넉넉히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신 아버지를 보았다.


"아부지 뭐 하시?"


"뭐 하긴 김장 방아 찧을 고추 고르지"


"오늘 같이 노는 손도 많은 날 같이하자 하시지 이 많은걸 언제 다 하실라고 우렁이 각시처럼 혼자만 하시?"


"이게 을매나 된다고 . 놀민놀민 슬슬 해도 금방 해. 아서 손 매우니 손대지 말고 가서 쉬"


"어떻게 고르고 계신지 어디 봅시다아~"


"방법이랄게 뭐 있어. 나일롱은 한쪽으로 빼놓고 잘 마른 거 갑바로 밀면 되지"


아버지와 나의 대화 소리를 들은 가족들이 마당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고 일꾼이 많은 덕분이었는지 작업은 금방 끝났다.




붉은 노을 말고 붉은 마당


"이따 안개 걷히고 해가 따뜻해지거든 마당에 고추 꼭지 따고 깨끗한 수건으로 잘 닦아서 포대에 담아 놓아라"


"네에"


가을걷이로 바쁜 엄마는 이슬비처럼 내리는 마당의 안개를 뚫고 우리가 잠들어 있는 방문 밖에서 목소리로만 지령을 내리시고 아버지의 힘찬 경운기 시동 소리와 함께 멀어지셨다.


곧 해가 뜨면서 안개가 걷혔고 햇볕이 따뜻해지자 우리는 언니가 준비해 준 행주를 한 개씩 들고 마당에 모였고


"자 그 끝을 잘 잡아봐 갑바 걷어내게"


"흐헉, 이렇게나 많아? 이 많은걸 언제 다 닦나 언니야?"


"그러니 얼른 해야지. 많다고 니 설렁설렁하면 안 된다. 이거 김장용이야"


"나는 매운 김치 안 먹어도 되는데. 안 닦으면 안 될까?"


나의 말에 언니가 가자미 눈을 하고 쏘아보며


"또 도망가면 이번엔 엄마한테 진짜 이른다. 이번엔 끝까지 해야 해"


"알았어. 나만 믿으라니"




마루에 있는 괘종시곗바늘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한 바퀴, 두 바퀴나 돌았지만 마당에 널린 고추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가을볕은 따땃하니 정수리와 등을 덥혀 주지만 흙마당에 떡 들러붙은 궁둥이는 차갑다 못해 지릿지릿 저려오다 감각이 둔해졌고 온몸이 지겨움에 근질거린 나는 마당에서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마루 괘종시계의 큰바늘과 작은 바늘이 만났는지 열두 번의 웅장한 소리가 났고 얼마 후 밭에 가셨던 할머니가 돌아오셨다.


"이잉 니들 안즉도 이맨큼 밖에 못 딲았노? 이래가꼬 방아 찧겄나?"


할머니가 우습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놀리셨다.


"할머이 지겨워 죽겠다. 누가 먹을라고 이렇게나 많이 닦으라고 하는 거여?"


"이잉 누가 먹긴. 식구들이 먹지"


나는 아까부터 마을회관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여전히 놀고 있는지가 궁금해 간혹 바람에 날려오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오신 틈을 타 슬금슬금 궁둥이를 밀어 붉은 마당에서 멀어진 뒤 벌떡 일어나 냅다 뛰었고 귓가에 언니가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 더 세게 마을회관을 향해 달렸다.




신나게 놀고 있는데 휘익하고 지나간 바람 한 줄기에 등이 허퉁하니 찬기운이 느껴지더니 연달아 재채기가 났고 기어코 콧물이 줄줄 매달리기 시작했다.


"야들아 해 질라니 춥다. 이제 고만 놀고 집으로 들어가자"


나는 동네 아이들에게 그만 놀자고 말하고 집으로 향했지만 막상 마당이 가까워지자 지은 죄가 있기에 발걸음은 점점 더 무겁게만 느껴졌다. 용기를 내어 대문간을 넘어가니 산처럼 쌓여 있던 붉은 마당은 사라지고 대신 광 문 앞에 빵빵해진 가마니 세 개가 안정감 있게 놓여 있었다.


"이 마한 것. 여태 어서 놀다 인제 드오노? 느 성이 저거 다하느라고 을매나 대근했는 줄 알어?"


마당에 조용히 들어와 고춧가마니를 구경하고 있던 등 뒤로 날아온 할머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깜짝이야. 할머이 놀랬자네"


"사람이 죄를 지니 깜짹 놀랬지. 일이 있음 거들고 살아야지 지혼자 논다고 쏜살같이 내빼고. 다시는 그라믄 못써. 명심하래이. 그리고 얼른 느 성한테 가서 미안 타고 해라"


할머니 말씀에 후회와 언니 얼굴을 어떻게 보나 걱정이 되었다.


"언니야 안 힘들었나?"


"간나야 어서 짤짤 거리고 놀다 인제 들어오나? 저 코에 땟구정물좀 봐. 방에 들어오지 말고 얼른 씻엇!"


언니의 화난 목소리가 느껴졌다.


"언니야 미안. 대신 내가 앞으로 언니 심부름 열 번 할게"


"열 번? 진짜지?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알겠어. 열 번. 약속 지킬게"




그날 언니는 내가 농땡이를 피웠다는 말을 엄마한테 전하지도 않았고 나는 저녁을 먹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고춧가마니는 엄마와 함께 아빠의 경운기를 타고 학교 동네 방앗간에 들러 고춧가루가 되어 돌아왔고 그 많던 고춧가루는 기가 막히게 알고 집에 들른 고모들과 작은아버지가 양심도 없이 푹푹 퍼서 가셨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 식구 몫의 고춧가루는 얼마 뒤 양념으로 버무려져 맛있는 김장김치가 되었고 매운 김치 안 먹는다고 큰소리치던 뻔뻔한 나는 김장하던 날 배춧속을 한 번 먹고 수돗가로 가서 물을 마시고 또 한 번 집어 먹고 수돗가로 가서 물을 마시기를 여러 번. 입가가 벌게져 후후 거리며 매운 내를 식히고 있었다.




식구들의 손을 거쳐 금방 다듬어져 마당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붉은 마당을 보면서 언니한테 일을 몽땅 넘기고 농땡이를 치며 놀았던 어린 시절과 그 철없던 손녀의 빈자리를 메꿔주셨던 할머니의 손길도 떠올랐다. 그리고 정말정말 놀라운 건 아버지가 틀니를 빼시면 할머니 얼굴이 보이고, 아버지가 앉아 계신 뒷모습은 마치 할머니가 앉아 계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두 분은 닮아 계신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것 같은 아버지의 어깨와 등을 보고 와서 묘한 기분이 드는 이번 추석 연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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