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의 두 남자

by 별바라기

막냇동생의 돌잔치 사진에 있는 할아버지는 연둣빛 나는 두루마기에 까만 갓을 쓰고 계시는데, 한집에 살았으나 할아버지에게 자주 안기지 못했던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 품에 안기자마자 죽어라 울고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의 할아버지가 사진에 담겨 있다. 그날 엄마가 비싼 돈을 주고 빌려온 필름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남아 있는 모든 사진에서 할머니의 손은 어린 손자들이 사진에 잘 찍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한결 같이 "저기 봐라" 하고 렌즈를 향해 손을 뻗고 계시는데, 그 덕분에 동생들의 얼굴은 죄다 가려져 몸통만을 보여주는 웃지 못할 사진들만 남아있다. 아빠의 누이들과, 사촌들과 동네의 또래 아가들로 꽉 찬 방은 돌잔치 집이 아닌 마치 보육원 같은 모습도 상상케 하지만, 그 당시 막냇동생의 첫 돌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모였던 많은 방문객을 보면서 동생은 참 귀하게 사랑을 많이 받은 아가였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곧 할아버지의 추도일이 다가온다. 내가 9살이 되던 여름, 장마가 시작되던 그 무렵에 돌아가셨으니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날 새벽에 엄마는 정신없이 자고 있는 나를 다급히 깨우셨고, 그 길로 소를 풀어 먹이던 산에 계신 아빠를 빨리 불러오라 했다. 언니보다는 빠른 내가 산에 가는 것이 낫겠다 싶었던 엄마의 결정이었는데, 더위속에 걷히지 않은 무거운 안개는 속눈썹에도 콧잔등에도 소리 없이 내려앉았고 나는 수많은 물방울들도 어부바를 한 채 숨차게 아빠를 향해 뛰고 있었다.


뛰다 서다를 반복하며, 고요한 새벽 공기 사이를 비집고 숨이차게 아빠를 부르는 내 목소리를 메아리로 들은 귀 밝은 아빠는 엄마가 전하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직감적으로 집을 향해 오토바이보다 빠르게 뛰어가시더니 금세 내 눈에서 사라지셨다. 나는 가던 길을 되돌아 다시 뛰다 서다를 반복하며 집으로 돌아가니 할아버지 곁에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몇 분 계셨고 옆집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목도 만져보고 손목도 만져보시더니


"○○이 안됐네. 운명하셨네"


하시며 아버지 어깨를 토닥이셨다.


나는 여느 때와 똑같이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갔고,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동네 친구가 담임선생님께


"선생님요 ○○○네 할아부지 돌아가셨대요"


하는 말에 나는 비밀을 들킨 것 마냥 친구에게 눈을 흘겼다.


하교 후 집에 가니 천막 아래로 긴 상들이 줄을 맞춰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수돗가 옆에는 커다란 솥들이 여러 개 걸려 장작이 타며 국이 끓고, 삼삼 오오 모인 친구네 엄마들이 가마솥 솥뚜껑에 전을 부쳐내고 계셨다. 얼굴을 아는 사람들과 모르는 사람들이 뒤섞여 발 디딜 틈 없이 혼잡스러운 마당이었지만 어린 나의 눈에는 그 분주함 속에 뭔가 체계적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중에 제일 바쁘게 일을 지휘하던 엄마는 마당 구석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작은방에서 자고 있는 동생들을 데리고 옆집 할머니네 문간방으로 가 있으라 하셨다. 그리고 엄마가 부를 때까지 절대 그 방에서 나오지 말고, 동생을 업고 가는 내 손에 봉다리를 하나 쥐어 주셨는데 문간방에 가서 풀어보니 옥춘이와 대추 사탕과 형형색색의 과자들이 담겨 있었다.


언니도 학교에서 돌아와 문간방 회원으로 합류를 했고, 우리 집의 동태를 담장 너머로 계속 살피던 나는 뭔가 부산스러운 웅성거림을 감지했다. 언니한테는 변소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문간방을 빠져나와 살곰살곰 고양이처럼 집으로 들어갔고 키가 작은 나는 어른들의 등에 가린 안방의 장면을 다 보진 못했지만 할아버지의 퉁퉁 불은 발이 보였는데 발가락 살갗이 다 벗겨져 있었다. 먼 훗날 할머니의 입관식에 참석하면서 안 것이지만 내가 훔쳐본 광경은 할아버지의 염습이었고 할아버지는 극심한 당뇨 증세와 여름 더위에 이미 부패가 진행되었던 상태셨던 것 같다.


그 장례기간 동안 크고 작은 싸움들이 일어났고, 막내 삼촌과 고모부가 몸싸움을 하면서 거울이 깨지고 술상이 뒤집어졌으며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는 애매한 고모들은 울고 아버지는 싸움을 뜯어말리느라 바빴는데 할머니는 싸움을 말리지도, 조문객을 맞으면서도 단 한 번도 울지 않으셨다. 오히려 고모할머니가 눈물 없이 "아이고아이고"를 녹음기 재생하듯 일정 간격을 두고 오빠를 잃은 슬픔을 소리로 표현하셨고, 나는 마당에 놓인 할아버지의 꽃상여를 보며 엄마가 장례식 음식으로 싸준 도시락을 들고 또 학교에 갔다.


할아버지는 선산에 묻히셨고 모든 장례일정도 끝이 났다. 고모들은 엄마가 챙겨준 음식들과 할머니가 그녀들의 몫으로 챙겨둔 말린 산나물들과 텃밭의 야채들까지 탈탈 챙겨 떠났고, 나는 할머니 방문을 열면 언제나처럼 할아버지가 앉아 계실 것 같아 한동안 그 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마당에 북적이던 그 많던 사람들이 떠나가고, 오롯이 우리 식구만 남게 되자 할머니는 할아버지 물건들을 리어카에 하나하나 담기 시작하셨다.


"할머이 그거 뭐할라고?'


"뭐하긴 니 할아버이한테 보내줄라 그라지"


"할아부지는 땅에 묻혔는데 어떻게 보내줘? 땅을 다시 파?"


"보내주는 방법이 있지"


그리고 나는 도랑 방향으로 가는 리어카를 밀며 할머니를 따라갔다.


할머니는 다리 밑에 리어카에 싣고 온 물건들을 죄다 내리시더니 음료수 병에 든 뭔가를 골고루 뿌리셨다. 그리고 성냥을 그어 종이에 불을 붙여 더미로 던지자 '훅' 소리를 내며 불이 붙었고, 시멘트 다리를 다 삼켜 버릴 듯한 시커멓고 빨간 괴물이 생겼는데 그 힘센 괴물들은 밤새도록 살아 있었다. 할머니는 뜨겁게 타고 있는 불 더미 앞에서,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를 긴 시간 내내 멍하니 쳐다보고만 계셨다.


할머니의 배필이자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나의 할아버지.

사람들은 우리 집을 ○의원 집이라 불렀다.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의원일을 하셨다고 했는데, 아버지의 등 너머로 침술을 배웠던 아들은 급체한 사람들이나 침을 놔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납작하고 뾰족한 침을 드셨고, 그 입소문을 타고 용한 침쟁이라는 별명을 얻으시면서 아주 먼 지역에서도 할아버지를 찾는 사람들도 오곤 했다. 지금 나의 판단으로는 무면허 의료종사자? 여하튼 할아버지는 침을 맞으러 왔던 할머니 집안 어른을 잘 치료해 드린 대가로 할머니를 소개받게 되셨고 그렇게 맺어진 부부의 연은 6남매를 얻으셨다.


할머니의 남편은 침을 맞으러 온 사람들과 어울리면 밭에는 절대 얼씬도 하지 않으셨고, 또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해 젊은 시절부터 말술을 즐겨 드신 데다 우리 집안에 쓸데없이 전해지는 당뇨라는 유전적인 요인까지 보태져 지천명이 되시던 해에 당뇨 합병증으로 두 눈을 잃으셨다. 몸에 이상이 있다 느끼셨을 때 의학의 도움을 받았으면 급격한 악화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자신의 몸에 무심했던 할아버지는 병원에 가셨을 때 이미 시신경이 전부 망가진 상태여서, 어쩜 그리 미련하냐며 소식을 듣고 달려온 고모들이 울고불고했었던 일도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하루 종일 방만 지키는 돌하르방 같은 분이 되셨다.


언니는 유난히 크고 흰 할아버지의 손에 손톱이 자라면 그 손톱을 잘라 드리는 일을 전담으로 맡았고, 아빠는 바리깡으로 할아버지의 밤톨 같은 하얀 머리카락을 밀어 드렸었다. 나는 옆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밀려나간 할아버지의 까실까실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을 좋아했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그럴 때마다 허허허 소리 내며 웃으셨는데 언제부턴가 할아버지는 웃음소리 말고 기침소리를 더 많이 내셨다.


할아버지의 세상은 좁았다. 방, 마당, 수돗가, 변소가 전부였는데 하루는 마당에 나오셨다가 빗물이 고여있던 젖은 땅을 밟으셨고 미끄러운 고무신은 할아버지를 마당에 눕혀 버렸다. 아빠보다 훨씬 더 키가 컸던 할아버지를 아빠도 끙끙 거리며 수돗가로 데리고 가 씻겨 드렸는데 할아버지 다리 근육이 소실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때 알지 못했다. 한 동안 할아버지는 변소에 가시지 못하고 요강에다 일을 보셨는데 나는 산에 가신 할머니를 대신해 할아버지의 요강 비우는 일을 했고, 할아버지는 내가 요강을 비워 드릴 때마다 허허허 웃음 대신 헛기침을 하시는 걸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대신하셨다.


그런 형편 때문에 할머니는 간간이 집에 농사일도 거드시며 산에 오르시는 일로 할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시게 되셨고, 그 긴 세월 속에 전문 약초꾼으로, 나물 채취 자면서 판매까지 하게 되셨으며, 종종 폭행사건과 교통사고를 일으키던 막내 삼촌 때문에 모여지던 쌈짓돈은 모여지기 무섭게 홀랑홀랑 털리기가 일쑤였다. 지금도 기억하는 정말 최악의 날은 장사를 한다며 1톤 트럭을 사달라고 했던 삼촌이 인사 사고를 냈고, 큰 합의금을 마련해야 했던 아빠는 가족 같이 키우던 소를 엄마소 한 마리만 남기고 다 파셔야 했다.


젊은 날 시력을 전부 소실해 라디오를 친구 삼아 살아있는 돌하르방처럼 방만 지키는 남편. 사흘이 멀다 하고 사고 치는 늦둥이 아들. 그 두 남자들 때문에 가녀린 몸으로, 망가진 관절로 무리하게 산을 타셨던 할머니는 산삼 다음으로 돈이 되었던 송이버섯을 따러 깊고 먼 산까지 가셨다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방향을 잃고, 강원도에서 충북까지 도를 넘어가셔서 충북 사람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주어 아빠가 차편을 급히 마련해 모시고 온 적이 있었다. 또 한날은 돌이 많은 산에 오르시다 발을 헛디뎌 이마가 깨져서 얼굴을 피범벅을 하고 나타나셔서 우리를 기함시킨 일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산에 가시지 말고 집에 들일이나 도와달라 하였지만, 항상 돈이 아들 부부의 싸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아셨던 할머니는 어떻게든 막내아들의 합의금은 당신 손으로 준비하고 싶은 책임감이 있으셨던 분이셨다. 나도 해마다 아버지 생신 때면 집에 가 뒤꼍에 있는 더덕과 생강을 캐곤 하는데 땅을 파서 뭔가 끄집어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없는 실력을 탓하기보다 괜히 연장 탓으로 돌렸다. 그런 체험을 통해 할머니가 떠오르고 자의던 타의던 오를 수밖에 없어던 산. 깊고, 높고, 적막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할머니가 올랐던 산에서의 작업들을 떠올리다 보면 같은 여자인 내가 생각해도 너무 가여워서 눈물이 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참 지나 할머니랑 약초를 다듬으며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받다가


"할머이 할아부지 안 보고 싶나?"


"보고숩지, 눈먼 영감이었어도, 나를 그렇게 쥐 때리고 살았어도 보고숩지"


나는 젊은 날의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절대 울지 않았던 할머니가 가슴으로 울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할머니도 보호받고 사랑받고 싶은 여자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보고숩지' 할머니의 그 짧지만 강렬했던 대답이 지금까지도 내 귓가에 맴돈다.


아래의 사진은 2013년 6월 시외할머니의 꽃상여 사진인데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 상여 이후로 처음 본 상여였다. 그때 상여보다는 많이 가벼워지고 화려해진, 진보된 상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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