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보러 동네 마트에 갔더니 다음 주로 다가온 정월대보름 때문인지 부럼용 견과류와 건나물류가 한아름 진열되어 있었다.
어렸을 적 좁은 하늘에 환하게 떠서 동네를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던 정월대보름달.
나와 동생들은 방문을 열고 휘영청 떠오른 커다란 달을 보면서 달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달 노래를 불렀었고 내가 조금 크면서 나에게 그날은 부모님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신 밤마실을 나가는 날이 되었다.
"느 낼이 뭔 날인지 아나?"
"할머이는 내가 뭐 바본가"
"그라믄 뭔 날인데"
"낼 보름이 자네. 그라니 이래 맛없는 밥에 나물만 먹지"
밥에 들어 있는 잡곡을 밥공기 구석으로 몰고 있는 나에게 할머니가 물으셨다.
"그냥 보름 아이고 증월대보름. 니 낼 니 동무가 이름 부르거든 절대 대답하지 말그래이"
"왜 대답을 하지 마?"
"니 동무가 니한테 더우 팔아 더우 먹을까 그라지"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이잉 거짓부렁 아니래니"
"할머이 내 친구는 나한테 더위 안 팔아. 그랬다간 내가 지구 끝까지 좇아가서 가마이 안 둬"
"야 000"
"왜?"
"내 더위 사라고 히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승호가 냅다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나는 얼결에 대답을 했고 더위를 샀다.
"야! 인정머리 없게 나한테 더위를 파나?"
"미안 나도 좀 전에 덕문이한테 더위 한 개 사는 바람에 니한테 판거여. 그나저나 이따가 저녁에 찰밥 먹으러 올거지?"
"시끄루와. 더위 사서 기분 나빠 안가"
"야아 기분 풀고 이따 와라 꼭"
승호는 자전거 손잡이에 두 손을 다 땐 체로 내게 손을 흔들고 휘파람을 불며 아랫마을로 사라졌다.
"할머이 나 더위 샀어"
"누가 그래 부지런히 니한테 더위를 팔았노?"
"승호새끼가"
"동무를 숭하믄 쓰나. 더우는 해뜨기 전에 팔아야는디 해 뜨고 팔았으니 효력이 읍지"
"할머이 진짜? 그럼 나 더위 안 산 거여?"
나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런저런 잡곡을 담아 시루에 쪄 내신 오곡밥을 넘어 구곡밥도 넘었을 밥을 양푼에 담고 오늘의 아지트인 덕문이네 사랑방으로 갔다.
"야 이 시끼가 오늘 나한테 더위 판 거 아나? 어떻게 의리 없이 더위를 파나?"
"나는 혹시나 하고 불러봤는데 니가 대답을 할 준 몰랐지"
"니 해 뜨고 나서 판 더위라서 효력 없는 거 알지?"
"그런 것도 있나?"
"어 우리 할머이가 그랬어"
"야 니들 쉰소리 집어치우고 깡통 숯 다 꺼지기 전에 얼른 먹고 망우리 돌리러 나가자"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성질 급한 승재가 찰지다 못해 딱딱하게 식어버린 주먹만 한 오곡밥을 입에 욱여넣으며 재촉하는 바람에 우리도 부지런히 밥을비벼 입에 넣었다.
그 시절 너무도 귀했던 깡통. 지금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구나
"윙 윙 윙"
승재랑 승호랑 덕문이가 새까만 밤이라는 도화지에 그리는 동그랗고 빨간 원그림은 우리의 웃음소리와 대보름 달빛과 함께 버무려져 마치 마법사의 요술봉 같았고, 망우리 깡통에서 떨어져 나와 타닥 거리다가 금세 사라지는 작은 불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 같았다.
우리 동네 나의 동갑내기 동무는 모두 7명이다. 7살 때부터 같이 놀았던 기억이 있고 고3 마칠 때까지 통학 버스에서 마주친 녀석들도 있었으니 꽤나 지겹도록 얼굴을 봤던 사인 거 같다. 그렇게 자라는 동안 우리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덕문이가 좋아하는 최진실이나 아정이가 좋아하는 전영록, 진옥이가 좋아하던 신승훈의 사진을 구입해 서로의 특별한 날을 챙기며 축하해 주기 시작했고, 그 일을 시작으로 그 뒤 성인이 되어 군에 갔을 때도 위문편지도 보내주고 휴가 나오면 밥도 먹고 노래방도 가서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쓰디쓴 소주도 한 잔 하면서 서로의 연애사도 들어주고 연애상담도 해주며 그렇게 나이가 들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서로 간의 애경사를 챙기며 지내고 있다.
마트를 뱅뱅 돌며 장을 보다가 부럼으로 나와 있는 땅콩 더미를 보고서 가을걷이에 부모님을 도왔던 땅콩 수확 작업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의 공식적 밤마실날인 그 시절 친구들과 고기를 굽던 숯불에 집어넣은 개수 대비 턱없이 적게 꺼내 먹었던 구운땅콩 사건도 떠오르고, 각기 가지고 온 찰밥과 나물을 모아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친구네 집으로 모여 밥을 비벼 먹었던 일, 중학생이 되어 모아놓은 용돈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십시일반 돈을 모아 학교 근처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조금 사다가 개울서 주운 넙덕한 돌판을 숯불에 올려 다리밑에서 고기를 굽다가 달궈진 돌이 반으로 쩍 갈라지면서 그 귀한 삼겹살 줄이 잿더미 사이로 추락했었던 쓴 기억도 떠올랐다. 그리고 어른들 몰래 마시던 막걸리의 텁텁함과 달달함, 샴페인을 첨 영접했을 때 들은 경쾌한 병뚜껑 따지는 소리와 목구멍이 몹시도 따꼼따꼼했던 맛은 아직도 생생하다.
장을 보고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구청 앞 교차로에 이웃 동에선 정월대보름 맞이 윷놀이 대회에 불꽃놀이 계획이 적힌 현수막이 걸린 것이 보였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정월대보름을 기억하고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구나 생각을 하면서 비시시 웃음이 난 것은 할머니의 산소에도 봄은 또 오고있겠지? 할미꽃과 제비꽃과 냉이꽃, 노란 산수유와 개나리가 환하게 필 봄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