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할머니네 파김치

달아난 입맛을 데리고 오소

by 별바라기
인간 승리!

겨울 내내 밭 한 구석을 얌전히 지키고 있던 아기 쪽파들은 점점 더 따스해지는 봄햇살에 기지개 한 번 키고 보슬보슬 내린 봄비에 목 한 번 축이고, 가끔씩 심술을 부리는 봄바람에 초록색 옷깃을 여미며 밭주인이 만나러 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야 니 내하고 저 건네 밭에 안 갔다 올래?"


"할머이 건네는 왜?"


"저어기 치다봐라 쪽파가 커가꼬 퍼런 무대기 안비나? 뽑아다가 김치 해물라 그라지. 니 애비가 파김치 좋아하잖나"


할머니는 내게 밭에 함께 가야 하는 이유를 꽤나 설득력 있게 말씀하셨고 또바리(똬리)와 호미 하나를 담은, 사방팔방 온통 찌그러져 볼품은 없지만 무게만은 가벼운 양은 다라를 할머니처럼 머리 위에 얹어 보겠다고 졸랐다.


"할머이 나한테 또바리 대고 다라 이키 줘봐"


"빈 다라를 왜 일라하나?"


"할머이처럼 해볼라고"


"아서, 빈 다라라도 이지 마래이 키 안크믄 우쨀라고"


할머니는 내 청은 거절하신 체 양은 다라를 옆구리에 끼고 도랑 건너 밭으로 향하셨다.



"이패리 안 뜯기게 조심해서 흙 털래이"


앞뒤 재지 않고 힘으로 밀어 부칠 나로 인해 연한 파가 뽑히다 끊어질까 걱정되신 할머니는 호미로 조심조심 흙을 달래 반쯤 뽑아 놓은 파 무더기의 흙을 살살살 털라 하셨고 나는 시키신 대로 흙을 털어 양은 다라 안에 차곡차곡 세웠다.

올 때는 휑하게 왔던 대머리 양은 다라는 금세 뾰족뾰족한 초록색 머리카락이 생겼고 정수리에 똬리를 얹고 손까지 놓고 안정적으로 걸어가시는 할머니 뒤에서 팔뚝에 호미를 핸드백처럼 건 나는 모델처럼 걷겠다고 궁뎅이를 씰룩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내 이래 대가리를 짤라주믄 니 요래요래 껍데기를 까믄 쉽대이"


할머니는 내게 빠르고 쉽게 파 손질하는 법을 알려주셨고 나는 매끈하고 깨끗한 흰 속살을 드러내는 파를 만나는 일이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작지만 정말 약삭빠른 할머니의 손을 통해 산더미 같던 파들은 깔끔하게 손질이 되었고, 깨끗하게 씻어 소쿠리에 건져 물이 삐면 할머니와 엄마의 합작 양념에 버무려져 맛있는 파김치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파 자체에서 우러나는 매운맛에 더해진 매운 양념맛에 파김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식구들은 정말 맛있다고 다들 내게 권했지만 끝까지 먹지 못하는 나를 불쌍한 듯,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파김치를 특별히 좋아하셨던 분은 아버지셨다.

지금도 좋아하셔서 엄마는 파가 자르지 않고 먹기 좋을 만큼 컸을 때를 놓치지 않으시고 김치를 담그시고, 파김치는 일 년 내내 우리 집 식탁을 채운다.

운 좋게도 장인어른의 입맛과 닮아 먹을 복이 있는 큰사위인 형부 앞으로 수북이 쌓아 놓은 파김치가 눈 깜짝할 새 비워지면 엄마는 비워진 그릇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셨고, 온 가족이 모여 고기라도 굽게 되는 날이면 잘 익은 파김치와 삼겹살의 만남은 모기에게 헌혈을 당해도 그닥 억울하지 않을 맛이었다.




나는 파 까는 일을 참 좋아한다.

마늘 까는 일, 멸치 똥 따는 일, 시래기 까는 일, 도라지 까는 일, 콩 까는 일, 고구마 줄기를 까는 일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작업을 하면서 몸은 고달프지만 맘이 편해지는 위로의 시간이 된다는 것을 할머니에게 일찍이 배웠던 것 같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삼촌과 고모를 잃으셨을 때 자리보존하시고 누워 계실 줄로만 알았는데 몇 날 며칠 나물만 다듬으시고 이른 새벽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밭에 풀을 메셨던 것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플 땐 몸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나였었기에 단순노동을 통해 복잡한 머리를 식히며 살아왔던 것도 같다.



마당에는 아직도 할머니의 자리가 있다.

마당 지정석에 앉아 장에 내다 파실 나물과 약초들을 손질하시고, 끼니 때 마다 상에 오를 식재료를 손질하셔서 바가지에 담아 늘상 첫 번째 장독대 위에 올려 두시던 할머니의 정겨운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한 폭의 영화처럼 아직도 마당에 머물고 있고, 올해도 여전히 도랑 건너 밭에는 그 추웠던 겨울을 씩씩하게 이기고 돋아난 파란 쪽파들이 줄을 서서 머리를 내밀었, 할머니 대신 엄마를 따라 파를 뽑아와 마당에서 쪽파를 다듬으며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다 보니 다듬어진 파가 소쿠리에 수북하게 쌓여간다. 정말 인간승리닷!


마당에는 아직도 할머니의 온도도 남아 있다.

나무가 키가 큰 것인지 당신의 키가 더 작아지신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성질 급하게 먼저 익은 토실토실한 빨간 앵두 몇 알을 증손주 손에 쥐어 주시려고 까치발로 매달려 계시던 그 앙상하고 굽은 손의 온도를 앵두나무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올해도 새순을 틔우려고 아가 촉들이 한가득 돋았고, 해마다 알았지만 모른 척해 주라고 손을 내 저으시던 할머니의 신신당부가 있던 이름 모를 새 부부가 둥지를 틀었던 주목 나무 끝에도 연두색 새잎이 다닥다닥 돋아났다. 그리고 담장 그늘 아래서 겨울 내내 쌓여 있던 빙하 같은 눈이 언제 녹을까? 걱정이었던, 그래서 그 밑으론 아무 생명체도 없어 보이던 쓸쓸한 화단에도 요술할머니가 마법을 부린 것처럼 튤립과 히아신스 싹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의 꽃밭

올해도 할머니 산소 뒷산엔 산수유가 노랗게 피었다. 작년엔 매실이 많이 달리지 않았다 하시더니 올해는 가지가 휘청이게 매화꽃도 피었다.

아직까지 내리는 옅은 서리에 엄마의 걱정스럽고 소박한 꽃밭은 현관 계단을 채우고 있고, 올해도 이렇게 고향에도 내 마음에도 봄은 오고 있다.

봄햇살과 봄바람과 웃음과 행복을 담아 버무린 엄마의 파김치가 달아난 입맛도 데리고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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