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이 눈의 본질이 아니라, 눈물이 눈의 본질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쓰는 언어만큼 생각한다고.
그럴까요?
패색 짙은 야구경기에서 감독이 선수들에게 외쳤습니다.
“져도 좋다. 그러나 구장을 찾은 팬들에게 감동을 줘라. 감동만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느낀 만큼 산다고 생각합니다. 뜨겁게 눈물 흘리고, 따끔하게 각성한 깊이만큼 산다고 봅니다. 보는 것이 눈의 본질이 아니라 눈물이 눈의 본질이니까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두뇌의 본질이 아니라 각성하는 것이 두뇌의 본질이니까요. 우리는 음학(音學)이 아니라 음악(音樂)을 즐기고, 인생학이 아니라 인생을 살고 있으니까요.
세상이 학교입니다. 내 주변에서 벌어졌던 일, 신문, 방송, SNS에서 듣고 보았던 일을 메모하고 정리해서 모았습니다.
내겐 ‘따뜻한 이야기, 따끔한 이야기’가 세상을 감동과 각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장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뇌와
사랑하는 마음의 심장과
두려움을 잊을 수 있는 용기는
이미 너희들 속에 있다.
그래도 원한다면 내가 만들어 주지.
하지만 사용하는 법은 알려 줄 수 없다.
그건 너희들 스스로 터득해야 하니까.”
- ‘오즈의 마법사’ 오즈의 대사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