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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권조 May 08. 2024

부산 가는 길 : 11일 차

대구 ▶ 청도


11일 차 자료 가운데 사실상 3분의 1이 같은 사진이다. 대부분의 자료는 보관 중에 소실된 모양이다. 그러나 아침이 대강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기억하고 있다.


친구네 집에서 일어나 근처 식당에 가 아침을 먹었다. 메뉴는 탕 종류로 기억한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서 친구와 헤어졌다.


그리고 버스를 탔다. 버스?




파동 행정복지센터 근처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 정류장을 영상으로 촬영했기에 그 이름과 주변 간판으로 대조해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다.

304번 버스였던 모양

이왕이면 걸어서 끝까지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걷는 수행이 아니었으니 괜찮을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힘들었는가벼 하는 정도의 마음


버스를 타고 이동한 시간은 약 15분 정도였다.


타고 내린 정류장을 특정하니 6km 정도의 구간이었다. 아마 도심을 얼마간 벗어나기까지만 버스를 타기로 스스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이 사진 한 장으로 정류장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진을 보니 날이 꽤 흐렸다. 그래도 비가 쏟아지는 게 아니라면 이런 날씨가 걷기에는 좋다.

싱 그린 청도 펄-럭

버스에서 내려 2시간 30분이 되지 않아 청도에 진입한 듯하다. 그러고 보면 서울을 벗어나 걷다 새마을 기를 마주치는 일이 많았다.

다시 시작된 바짝 붙어서 걷기
차도에 지쳐 다시 자전거길에 오르고 만 모양
청도 와서 웃자 ㅎㅎ

지금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다면, 챙기리라 다짐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는 고프로와 같이 휴대폰과 별개로 사용할 수 있는 녹화 장치다. 그러나 도심을 걸어 다니면서 촬영을 계속하자니 지나는 사람들의 면면이 모두 드러나 담기는 것이 부담스럽다. 덮개를 마련해야 할까?


두 번째로는 GPS를 이용한 경로 기록이다. 내비게이션 어플 또는 운동용 어플을 활용할 수 있겠다 싶다. 나아가 걸음 수를 확인하는 것도 재미가 있지 않을까?


8년 전에 잘 기록하고 정리했으면 이런 후회 섞인 다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전국 4위 축하합니다

그리고 청도에 들어선 2016년 9월 12일은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던 날이었다.




일찍이 숙소를 찾아 들어간 나는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어지럼증을 느꼈다.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는 생각 중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나 기절하는 건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이어, 어지럼증이 아니라 바닥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란 걸 알게 됐다.


위기 상황에 대처를 잘하는 편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벌거벗은 채 바닥이 좌우로 출렁이며 흔들린 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벌거벗은 채 뛰쳐나가 목숨을 건지기' 또는 '방 안에서 죽더라도 옷을 입은 채 발견되기'였다. 그리고 나는 '벌거벗은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를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옷을 급하게 입고 휴대폰만 챙겨 숙소를 나왔다. 그나마 넓고 탁 트인 공간을 찾아가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그 와중에 멋있어 보여서 찍었다

무너진 건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와도 연락이 되질 않았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터지지 않는다는 말이 들려왔다. 아마 기지국이 견디지 못할 만큼 통화량이 폭주했던 모양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리고 이 즈음을 정리하면서 왜 내가 버스를 탔는지도 대강 생각이 났다.


당시, 청도에서 여자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부산까지 걸어가는 김에 청도 정도에서 데이트나 할까 하는 기발한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부산까지 10일 안에 갈 수 있음을 자신하고, 여자친구와의 만남을 미루었다. 그런데 약속한 10일이 가까워지도록 부산에 다다를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여자친구는 '같이 걷겠다'를 선언하고 말았다. 그래서 청도역으로 기차를 타고 오는 여자친구를 제때 만나기 위해 서두른 참이었다.


그리고 여자친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하염없이 공원에 앉아있던 나는 마침 저녁을 먹지 않은 걸 떠올랐다. 나는 가까이 편의점에 들렀다. 손님은 나 한 명뿐이었고 아르바이트 직원이 한 명 있었다. 그리고 컵라면과 삼각김밥 등을 대충 집어서 계산대로 가는 중에 또 한 번 바닥이 흔들렸다.


진열대가 덜컹거리고 물건이 몇 떨어지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직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계산대를 나와 도망쳤다.


멍하니 계산대 앞에 도착한 나는 '그냥 가져가야 하나?', '이제 우리나라 디스토피아 무법지대가 되는 건가?' 하는 따위의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안쪽 창고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있었다. 아마 점주가 아니었을까 하는데 텅 빈 계산대를 보고는 욕설과 함께, "사장을 버리고 도망가?"라는 말을 외쳤다. 투덜거리는 점주를 위로할 여유까지는 없었기에 나는 계산을 마치고 나왔다.




이제 숙소에 들어가지 못하는 걸까 고민하던 중에 검은 고양이를 만났다. 평소 같으면 가까이 오지 않았을 텐데 다리 근처를 한동안 어슬렁거렸다.


깜깜

그리고 여자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청도역으로 가던 기차가 중간중간 멈추는 바람에 예정보다 늦어졌다고 했다. 휴대폰으로 통화가 되지 않는 건 여자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생사도 모르고 연락도 닿지 않던 차에 타지에서 만나니 새삼 애틋한 감정이 들었다. 물론 다시는 처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게 여자친구(이)가 동료가 되어 11일 차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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