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분지
구기면 말의 콧김 소리가 난다
힘껏 달려온 뒤끝
비강에 비벼지는 거친 숨
종이 한 장은 들판의 일부분이다
살펴보면 억새풀이나 개양귀비
밀 싹들이 밀집되어 있다
마분지에다 자음과 모음을 파종하면
훗날 밀 싹 들쑤시고 억새풀과 개양귀비를
샅샅이 뒤져야 비로소 찾을 수 있다
골똘하게 씹고
또 씹은 뒤끝이야말로 한 줄의 문장이 되듯,
말이 여념 없이 되새김질한 배설로
만들어진다는 마분지
그 옛날 어떤 그림에선
말똥 냄새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고삐처럼 바투 잡은 글
안장처럼 온편한 글
발고리처럼 중심 잡힌 글도
다 마분지 배경에 누렇게 기록되어 있다
말똥 속엔 마부의 땀 냄새나 휘갈기던 채찍의 각도
적당히 소화되다 만 건초들의 아우성과
독기 어린 가시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것들을 잘 걸러 내면
바람이 헤집은 마분지 행간에도
배추흰나비 날아들 터
편자를 박은 제목들이
책 표지마다 야무지게 매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