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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채굴기 04화

마분지

by 이주송

마분지




구기면 말의 콧김 소리가 난다

힘껏 달려온 뒤끝

비강에 비벼지는 거친 숨


종이 한 장은 들판의 일부분이다

살펴보면 억새풀이나 개양귀비

밀 싹들이 밀집되어 있다

마분지에다 자음과 모음을 파종하면

훗날 밀 싹 들쑤시고 억새풀과 개양귀비를

샅샅이 뒤져야 비로소 찾을 수 있다


골똘하게 씹고

또 씹은 뒤끝이야말로 한 줄의 문장이 되듯,

말이 여념 없이 되새김질한 배설로

만들어진다는 마분지

그 옛날 어떤 그림에선

말똥 냄새가 나기도 했을 것이다


고삐처럼 바투 잡은 글

안장처럼 온편한 글

발고리처럼 중심 잡힌 글도

다 마분지 배경에 누렇게 기록되어 있다


말똥 속엔 마부의 땀 냄새나 휘갈기던 채찍의 각도

적당히 소화되다 만 건초들의 아우성과

독기 어린 가시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것들을 잘 걸러 내면

바람이 헤집은 마분지 행간에도

배추흰나비 날아들 터


편자를 박은 제목들이

책 표지마다 야무지게 매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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