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구 Jul 09. 2023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애틋해

Flexibility



S야, 나는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애틋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작은 영화관이 생겼어. 실은 조금만 더 걸으면 큰 영화관이 하나 더 있는데 상업영화들 위주로 상영을 해서 그런지 썩 마음이 가진 않더라고. 한동안 새로 생긴 영화관을 지켜보다가 '너라는 조합'이라는 영화가 걸린 것을 보고 홀린 듯 들어간 적이 있었어. 그 영화관에는 상영관 단 두 곳만 있었고 팝콘과 콜라, 오렌지주스, 세 가지 종류의 감자칩 같은 것들을 팔았어. 간식들이 전부 스몰 사이즈인 게 마음에 들어서 이 영화관에 자주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 상영관 내부는 아주 작고 고요했고 습도도 조금 높았어. 그래서 네가 떠올랐어. 무더운 여름날 약간은 찐득한 공기 속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네가 내 옆에 함께 있는 것 같더라.


누군가 내게 넌 어떤 재능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지. 더는 못 살겠다 싶은 순간에 반짝이는 사람을 발견해내는 능력이 있어요. 아주 잠잠하지만 사무치게 외로운 바로 그 순간에 매우 반짝이는 누군가와 적당히 멀고 조금은 가까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능력. 그걸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게 내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이라고 생각해.


인간이 무언가를 잘 몰라서 불행한 적이 있었나? 어떤 기술은 너무 잘 알아서, 우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어서, 우린 그래서 자꾸만 끝도 없이 발전했는데, 이러한 성장이 우리를 더 기쁘게 했었나? 인간이 레저 다이빙을 하려면 특수한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도 수심 30m 이내까지만 즐길 수 있대. 그 이하부터는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해. 나는 바다가 지금처럼 컴컴하고 영원히 더 잘 알기 어려운 공간이면 좋겠어. 모든 걸 잘 알게되어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두려워. 현재는 버려둔 채 말이야.


나는 너 역시도 영원히 잘 모르고 싶어. 서로의 이 흐릿한 잔상 속에서 가끔씩 쌓아가는 대화들로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실은 두 번의 이전 연애에서는 그 사람의 과거까지 모조리 알고 싶어했는데, 나는 너의 모든 면을 샅샅이 아주 깊게 알고 싶지는 않아. 이제는 너와 나 사이의 현재만 궁금해. 우리가 만나는 그 순간 나누는 대화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감정같은 것들만 간직하고 싶어.


요새는 자꾸만 사람들이 올린 자신의 일상을 보고 있는 게 버거워. 아침엔 요거트와 그래놀라, 그 다음엔 요가나 헬스, 직장 생활이나 대학생활 이후에 따라오는 친구 혹은 동료와의 저녁식사, 혹은 정돈된 자취방에서 해먹는 요리. 하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기 어려워. 그들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지, 그 시선의 끝에 누가 있는지, 나는 그게 더 궁금한데. 그들이 부럽고 지겨워.


나는 그래서자꾸 숨기는 사람이 돼. 끊임없이 세상을, 주변을, 너를,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나의 일상은 숨기는 사람. 어차피 나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도 내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고역 속에서조차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졌어. 사실은 자신이 없거든. 나를 너무 어여뻐하거나 너무 가여워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잘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내가 나를 잘 숨겨서 너와 나 사이에 어떤 막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퍼즐이었으면 좋겠어. 억지로 이해한 척 우리의 관계를 단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혼자 몇 개월을 살다보니 생이 곧 고통임을 마음 깊이 알게 되어버렸어. 이젠 어떤 선택을 해도 거의 50.8:49.2로 전자를 선택해. 아주아주 근소한 차이로 아주 조금 더 나은 것을 선택하니 전자를 선택해도 고통이야. 후자에 후회가 남고 전자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고. 그래도 그 50.8의 선택이 마치 100의 선택이었던 것처럼, 완전히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되려해. 그런 방식으로 나를 숨기면서 너와 가까워지려 해.


S야, 너를 정말 애정해.


이전 09화 사랑하는 내 동생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