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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구 Jul 09. 2023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애틋해

Flexibility



S야, 나는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애틋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작은 영화관이 생겼어. 실은 조금만 더 걸으면 큰 영화관이 하나 더 있는데 상업영화들 위주로 상영을 해서 그런지 썩 마음이 가진 않더라고. 한동안 새로 생긴 영화관을 지켜보다가 '너라는 조합'이라는 영화가 걸린 것을 보고 홀린 듯 들어간 적이 있었어. 그 영화관에는 상영관 단 두 곳만 있었고 팝콘과 콜라, 오렌지주스, 세 가지 종류의 감자칩 같은 것들을 팔았어. 간식들이 전부 스몰 사이즈인 게 마음에 들어서 이 영화관에 자주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지. 상영관 내부는 아주 작고 고요했고 습도도 조금 높았어. 그래서 네가 떠올랐어. 무더운 여름날 약간은 찐득한 공기 속에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네가 내 옆에 함께 있는 것 같더라.


누군가 내게 넌 어떤 재능이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 나는 자신있게 대답했지. 더는 못 살겠다 싶은 순간에 반짝이는 사람을 발견해내는 능력이 있어요. 아주 잠잠하지만 사무치게 외로운 바로 그 순간에 매우 반짝이는 누군가와 적당히 멀고 조금은 가까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능력. 그걸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게 내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이라고 생각해.


인간이 무언가를 잘 몰라서 불행한 적이 있었나? 어떤 기술은 너무 잘 알아서, 우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어서, 우린 그래서 자꾸만 끝도 없이 발전했는데, 이러한 성장이 우리를 더 기쁘게 했었나? 인간이 레저 다이빙을 하려면 특수한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도 수심 30m 이내까지만 즐길 수 있대. 그 이하부터는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해. 나는 바다가 지금처럼 컴컴하고 영원히 더 잘 알기 어려운 공간이면 좋겠어. 모든 걸 잘 알게되어 미래를 예측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두려워. 현재는 버려둔 채 말이야.


나는 너 역시도 영원히 잘 모르고 싶어. 서로의 이 흐릿한 잔상 속에서 가끔씩 쌓아가는 대화들로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실은 두 번의 이전 연애에서는 그 사람의 과거까지 모조리 알고 싶어했는데, 나는 너의 모든 면을 샅샅이 아주 깊게 알고 싶지는 않아. 이제는 너와 나 사이의 현재만 궁금해. 우리가 만나는 그 순간 나누는 대화와 거기에서 생겨나는 감정같은 것들만 간직하고 싶어.


요새는 자꾸만 사람들이 올린 자신의 일상을 보고 있는 게 버거워. 아침엔 요거트와 그래놀라, 그 다음엔 요가나 헬스, 직장 생활이나 대학생활 이후에 따라오는 친구 혹은 동료와의 저녁식사, 혹은 정돈된 자취방에서 해먹는 요리. 하지만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기 어려워. 그들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떤지, 그 시선의 끝에 누가 있는지, 나는 그게 더 궁금한데. 그들이 부럽고 지겨워.


나는 그래서자꾸 숨기는 사람이 돼. 끊임없이 세상을, 주변을, 너를,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나의 일상은 숨기는 사람. 어차피 나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도 내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고역 속에서조차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졌어. 사실은 자신이 없거든. 나를 너무 어여뻐하거나 너무 가여워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 대해 잘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내가 나를 잘 숨겨서 너와 나 사이에 어떤 막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우리가 서로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퍼즐이었으면 좋겠어. 억지로 이해한 척 우리의 관계를 단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혼자 몇 개월을 살다보니 생이 곧 고통임을 마음 깊이 알게 되어버렸어. 이젠 어떤 선택을 해도 거의 50.8:49.2로 전자를 선택해. 아주아주 근소한 차이로 아주 조금 더 나은 것을 선택하니 전자를 선택해도 고통이야. 후자에 후회가 남고 전자도 충분히 행복하지 않고. 그래도 그 50.8의 선택이 마치 100의 선택이었던 것처럼, 완전히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되려해. 그런 방식으로 나를 숨기면서 너와 가까워지려 해.


S야, 너를 정말 애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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