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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미 Jun 03. 2024

뚜벅이와 당근이의 만남

발품, 팔아도 너무 판다.

나는 ‘뚜벅이’면서 ‘당근이’이다. 멀리 가지 못하는 뚜벅이에겐 당근마켓은 동네 슈퍼나 다름없다. 동네 근처에서 판매자를 만나서 물건을 사니까 무점포 이동식 가게 정도다.  

   

뚜벅이가 욕심을 내면 상황이 달라진다. 분수도 모르는 이 뚜벅이(지은이 자신)는 일을 크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뚜벅이라는 걸 망각한 채 부피가 큰 물건에 눈독을 들인다. 거리 상관없이 구매 약속을 잡는다. 앞뒤 재보지 않고 일단 달려든다. 된통 애를 먹고서야 사태 파악이 되지만 다음번에도 마찬가지이다. 판단력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뚜벅이인가 보다.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이 뚜벅이는 길거리에 뿌리는 돈이 세상에서 가장 아깝다. 밥하기가 귀찮아서 배달 음식을 시킬 때도 배달비 내기 싫어서 픽업으로 주문한다. 시간에 쫓겨 지각을 면하고자 어쩔 수 없이 올라탄 택시에서 머리를 쥐어박는다. 그래서 당근마켓에서 편의점 택배, 반값 택배, 용달 등 입맛대로 고를 수 있지만 전부 마다하고, 굳이 직접 발품을 파는 것이다. 시간을 돈으로 환산할 줄 모르는 정말 바보다. 남아도는 시간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겠고.     


어느 날 이 뚜벅이가 아이템을 장착했다. 서울시 공공자전거 따릉이. 따릉이를 이용하면서 활동 영역은 더 넓어졌다. KTX로 하루 생활권이 형성되었다는데 따릉이를 타고부터 뚜벅이는 못 갈 곳이 없었다. 그저 가보지 않았을 뿐이다. 당근 거래를 핑계로 동네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도장 찍기 여행처럼 여기저기 찍고, 다닌다.      

당근마켓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기준으로 거래 동네를 4단계로 설정하게 되어있다. 1단계가 근거리고, 4단계로 갈수록 멀어진다. 4단계로 설정했더니 성내동에서 강동구, 송파구 일대를 아우르고, 경기도 하남 일부 지역, 강남구, 성동구 끄트머리까지 맞물렸다.     

 

따릉이 아이템을 확보한 뚜벅이가 혼자 묻고 답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어디든지 가오리다.” 

개척정신이 투철한 선구자나 전도자의 답변이 아니고, 그저 중고 물품 한 개 건져 오는 당근이의 대답이다. 보따리장수가 물건 떼러 다니는 거나 별반 다르지 않은데 포부만 거창하다. 도전 의식이 생긴다. 광개토대왕도 아니면서 영역 확장에 욕심을 낸다. 내가 이렇게나 도전적인 사람이었나? 말이 좋아 도전정신이지 실상 무모하기에 그지없다. 


     

한번은 필립스 에어프라이어 초기 모델이 당근마켓에 올라왔다. 만능 요리기구로 소문이 자자했던 에어프라이어. 명성만 들어봤지 써보지 않아 궁금하던 참이었다. 이사로 물건을 처분한다는 한 줄짜리 문장에, 제품 외관 정면 사진 한 장이 전부였다. 가격이 오 천원이니 물건 상태를 따질 것도 없었다. 작동 여부도 묻지 않고, 사겠다고 톡을 보냈다. 위치는 송파구 개롱역을 지나 마천 쪽이었다. ‘네이버 길찾기’로 소요 시간을 두드려보니 자전거로 18분 찍혔다. 성내천 따라 쭉 가기만 하면 도착이라 길이 복잡하지도 않았다. 우리 집에도 에어프라이어가 들어오다니. 난생처음 에어프라이어를 맞이할 생각에 두근거렸다.      


집에서 마천까지 정말 멀었다. 지도상으로는 금방이었는데 체감거리는 끝이 없다. 큰길을 따라 올림픽공원역까지 가서 샛길로 접어들면 성내천 길이다. 하염없이 페달을 돌려도 다람쥐 쳇바퀴처럼 거기가 거기 같다. 이렇게까지 갈 일인가 하는 후회가 잠깐 들었다. 그래도 기대감에 버틸 수 있었다. 성내천 주변에서 운동하는 처음 본 사람에게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고 싶었으니까. 

‘저 지금 필립스 에어프라이어를 가지러 가는 길이에요.’      


“차 안 가지고 오셨어요?” 

판매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따릉이를 끌고 쭐레쭐레 온 모습에 황당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진상으로 분명 자그마해 보여 ‘1인용으로 딱이겠다’ 싶었는데 실물은 몸집이 뚱뚱하고 묵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스켓 기본 크기가 그렇단다. 가뿐하게 들고 오려고 챙겨갔던 배낭이 무색해졌다. 에어프라이어를 따릉이 앞 바구니에 살짝 걸치고 쑤셔 넣었다. 앞 핸들이 휘청거렸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안장에 앉아서 조심스레 바퀴를 굴렸다. 괜찮겠냐는 판매자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길을 떠났다. 득템한 기쁨을 만끽할 새가 없었다. 어쩌든지 이 뚱보를 집에 데려가야 했다. 인생 최대 미션 같았다. 먼 길을 다시 돌아갈 생각에 막막해졌다.  

   

얼마나 갔을까?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 예보를 무릅쓰고 강행한 길이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우산을 펴서 앞쪽 바구니 틈새로 손잡이를 끼워 넣었다. 전자제품이라 뚱보를 비를 맞히게 할 수는 없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지 가는 내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30여 분 뚱보 에어프라이어는 빗속을 뚫고, 덜컹거리는 충격을 이겨내고 결국 집에 들어왔다. 에어프라이어를 보필하며 데려온 뚜벅이는 너덜너덜해졌다.     

 

그 에어프라이어는 ‘그럴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뚜벅이의 발품과 바꿀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에어프라이어 내부 바스켓은 기름때가 덕지덕지 붙어 적나라하게 사용감을 드러냈다. 닦고 또 닦아도 깜정물이 끝도 없이 나왔다. 공기 순환식이라 가스 불보다 요리 시간이 훨씬 길어서 인내심이 필요했다. 노릇노릇 기름에 굽거나 튀긴 맛에 길들어진 내 입에는 약간은 심심한 느낌이었다.  에어프라이어가 원래 그렇단다. 열심히 닦고 청소하고는, 몇 번 쓰지 않고, 재당근으로 다음 고객님께 넘겼다.   
  


다행히 이 사건으로 뚜벅이에게 나름 기준이 생겼다. ‘그럴만한 물건’인지 한 번은 더 생각하게 되었다. 머리가 나빠서 손발이 고생하는 일이 조금 줄었다. 수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따져보고 움직이려 한다. 물론 여전히 물욕에 마음부터 앞서가곤 하지만 한 박자 늦추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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