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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미 May 27. 2024

N 번째 주인이 된 소감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헌 집 다오

“처음 뵙겠습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처음 만날 때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왠지 모를 긴장도 되고, 나름 격식을 차려서 맞이한다.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기분이다. 


새로 산 노트. 조심스레 겉장을 넘기니 새하얀 속이 드러난다. 말끔한 얼굴이 더러워질까 첫 번째 페이지는 속지로 비워둔다. 볼펜 자국 묻을까 봐 볼펜 똥 닦을 휴지를 대기시킨다. 

신간 만화책을 사고는 접힌 자국이 남는 게 정말이지 싫었다. 책을 45도로 살짝 열어 틈 사이로 그림과 활자를 확인하며 읽곤 했다. 

신상 구두, 가방을 들이면 기스날까 봐 애지중지 살피고 닦는 날이 계속된다. 미세한 흠집이라도 발견되는 날이면 마음에도 두꺼운 줄이 찍 그어진다. 

언제까지나 새것이었음 하는 욕심이 나서 몸가짐이 달라진다. 최대한 흔적 안 나게 쓰려는 노력이 이어진다.      

시간이 흐르면 강산이 변하고, 마음도 바뀐다.

조심스러웠던 마음과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누그러든다. 몇 번 봤다고 익숙해져서 친한 느낌마저 든다. 더는 손님이 아닌 안방마님처럼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헌 집 다오

내가 중고 물건을 찾는 이유는 이런 편안함 때문이다. 요란스럽게 손님 맞이하듯 예의를 갖추는 단계는 건너뛴다. 호들갑 떨 필요 없다. 중고품이 집에 오는 날이면 제집인 것처럼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내가 그 물건의 첫 번째 주인이든 두 번째 주인이든 상관없다. 돌고 돌고 돌아 마지막으로 안착한다 해도 괜찮다. 그저 나는 저 물건이 필요했고, 물건은 제 주인을 만났으니 서로 윈윈관계다.      


많이 썼다고 해서 딱히 닳는 것도 아니다. 보풀이 잘 나는 재질의 니트 말고는, 사용 흔적이 남지 않아 말끔한 것이 많다. 몇 번 썼다고 해서 사용감이 바로 묻어나는 것도 아니다. 손때를 감식하기도 어렵다. 당근마켓에서는 별 차이가 없는 물건에 새 제품급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판매하기도 한다.    

  

한번 갔다 온 물건은 가격 면에서도 부담 없다. 돌고 돌수록 가격은 훅훅 내려간다. 카드 명세서를 받아 들고 헉! 할 때가 많은데 당근 가계부는 그만한 위력은 없다. 고가의 물건을 구매한 후에 마음 졸이며 후회한 일이 많았다. 당근마켓 쇼핑은 뒤끝도 없고, 속이 편하다. 물건이 기대감에 미치지 못해서 구시렁거리려는 찰나 ‘OO 원인데.’ 라는 말로 말끔하게 정리된다.      


중고품 애용으로 자원순환 면에서 한몫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인을 정하지 않은 채로 돌아가면서 쓰는 공유 경제에서 보면 당근마켓 거래가 칭찬받을 일이다. 건강한 소비라는 생각에 자꾸 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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