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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May 27. 2024

못 찾으면 못 찾는 대로 그것도 또 하나의 길

「무작정(無酌定)을 작정(作定)한 퇴사」를 지지하며

무작정(無酌定)으로 작정(作定)한 퇴사였다.


말로만 들었었지 바로 코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가장 가까운 회사 동생의 폭탄선언. 모든 월급쟁이의 버킷리스트 로망. 그러나 절대 아무나 하지는 못한다는 ‘무작정 퇴사’.


가만, 무작정 퇴사라고 하는 게 맞는 건가? 그 어떤 설득에도 꿈쩍하지 않는 단단한 결심의 실천이라고 본다면 작정(作定)한 퇴사라고 하는 게 더 맞나? 그래. 그런데, 무작정 퇴사도 맞다. 무작정(無酌定)의 뜻 그대로, ‘어떻게 하리라고 미리 정한 것 없이’ 대책 없이 훌쩍 떠나는 것이라고 하니.


그래. 그래서 이 친구의 퇴사는 무작정이면서 작정이다. 무작정(無酌定)으로 작정(作定)한 퇴사.


퇴사 선언을 듣게 된 동료들의 첫 반응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똑같았다.


“나가서 뭐 할 건데?”

“안 정했어요. 이제 나가서 생각해 봐야죠.”


급여가 많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회사다. 업무강도가 센 것도 아니다. 퇴사를 결행한 장본인은 평균보다 젊은 나이에 들어와 평균보다 훨씬 더 빨리 승진까지 해서 30대 중반에 이미 중간 관리자가 된 상황이다. 업무 능력도 탁월하고 사내 인간관계도 더없이 좋다. 세상 일반의 잣대로 쟀을 때, 남부럽지 않은 여건의 직장이다. 그러하기에 세상 일반의 시선으로 봤을 때, 이 친구는 정신 나간 미친 짓을 저지르는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딱 하나, 아직 미혼이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다는 사실은 그의 결심을 평균보다 훨씬 덜 어렵게 했을 테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붙잡고 술을 먹였다. 함께 잔을 부딪치고 기울인 5시간 동안, 어르고 달래고 윽박지르고 쌍욕까지 던지면서 설득했다.


그러나 생각보다도 더 완강했다. 이미 결심한 이 친구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태양과 달의 위치를 맞바꾸는 것보다 힘들어 보였다.


“좋아. 그만둬도 좋아. 어차피 네 인생 네가 사는 거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차라리 휴직을 내. 1년 정도 쉬면서 깊이 다시 생각해 봐. 지금의 네 결심을 스스로 다시 검증해 봐. 그래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때 사표를 내도 늦지 않잖아. 아니, 그보다는 나가서 뭘 어떻게 할 건지. 그것부터 확실하게 정해. 지도, 로드맵, 플랜. 아무튼 뭐가 됐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이 결정되면, 어떻게 할지 확실하게 정해지면 그때 나가. 건물 월세나 은행 예금 까먹으면서 빈둥거릴 수 있을 정도로 네가 부자는 아니잖아. 무작정 나가는 건 절대로 아니 된다.”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요? 어떻게든 굶지는 않겠죠.”


“......(속으로: 부럽다 이 객기. 그래, 나도 밥 줘야 할 입이 내 거 하나뿐이라면 그런 말 쉽게(?) 하겠다. 이놈아.)”

“......”


“너 혹시 로또 맞았냐?”

“아뇨. 무슨, 저 복권 안 사는 거 알면서.”


“코인이나 주식 터졌어?”

“코인이랑 주식은 다 손해 보고 판 지가 언젠데.”


“그럼 나가서 대체 무슨 일을 할 거냐고? 뭘 해서 밥을 드실 거냐고?”

“아파트랑 차 팔아서 세계 일주할 거예요. 한 5년 정도. 지구 한 바퀴.”


“......(속으로: 부럽게도 미쳤구나.)”

“우선 알래스카부터 시작해서 캐나다, 미국, 멕시코. 남미 거쳐서 아프리카 남아공으로 넘어가려 해요. 그렇게 시작해서 갈 수 있는 모든 나라는 다 가 보려고요.”


“좋아. 그럼 그렇게 세계 일주 여행 다녀와서 도대체 뭘 할 거냐고?”

“그건 돌아다니면서 생각해 볼 거예요.”


“......”

보고 듣고, 걷고 생각하면서 길을 찾는 거죠.


“못 찾으면?”

못 찾으면 못 찾는 대로 그것도 또 다른 길이지 않을까요?


“......”

이 지점에서 제대로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설득하는 자와 설득당하는 자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형!”

“응.”


“사는 게 말이죠. 음. 사람 영원히 사는 거 아니잖아요. 만약 제가 80살까지 산다고 치면, 이제 저한테는 40년 좀 넘게 남은 거예요. 뭐랄까......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HP(Health Power)가 이제 절반 남은 거예요. 저는 지금이 가장 늦었으면서 가장 빠른 때라고 생각해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해요. 세상 가 볼 수 있는 데까지 가서 한 번 직접 눈으로 보려고요. 그러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뭘 하면서 보낼 건지를 생각할 거예요. 답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러면 그런대로 그것도 괜찮은 거 아닐까요? 다녀와서는 무슨 일이든 아르바이트로 하면 밥은 먹고살 수 있으니까.”

“......”


“꼭 뭘 찾거나 얻어야지만 보람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는 게 어차피 죽는 날까지 여행하다 가는 거예요. 지금 나는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고 같은 장소만 무한 반복으로 오가면서 쉽지만 재미는 없는 여행을 하고 있어요. 한 번뿐인 여행. 순간순간 더 재밌고 다채롭게 보고 듣는 것. 저는 그걸 바라는 거예요. 사는 것도, 여행도, 그 자체가 목적이죠. 삶은, 시간은 무엇을 위해 희생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목적이고 의미 아닐까요?”

“......”


머릿속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스티브 잡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여정이 바로 보상이다. (The journey is the reward.)


더 정확하게 의역하자면, “여행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다.”


어디로 향해 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걷는다는 것, 걷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이유이며 인생의 목적이다.


흔한 이야기다. 저 멀리 잘 보이지도 않는 산꼭대기에만 눈길을 두고 걷느라, 발길을 스치는 길가 풀꽃을 놓치고 땀을 식혀주는 바람의 향기를 느끼지 못한다. 1분 뒤에 자신이 살아있을지도 함부로 장담하지 못하는 삶인데, 왜 시선은 그보다도 훨씬 멀리 있는 미래를 향하는 것일까.


한동안 말이 없다가 술잔을 부딪치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래. 넌 ‘지금, 여기’를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떠나는 거로구나.”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가라.”

“네?”


“가라. 네가 작정한 그 길. 네 말이 다 맞다. 지금부터는 네 결심을 지지하고 응원한다.”

“고마워요. 형. 이해해 줘서.”


“딱 하나만 부탁하자.”

“뭔데요?”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마라. 절대로.”

“네.”


“소설 ‘좀머 씨 이야기’ 속 주인공 좀머 씨는 말이야.”

“네.”


“평생 걷고 또 걸어 다니기만 하다가, 마지막에는 물속으로 꼬르륵 들어가 버렸지.”

“......”


“넌 다치지도 아프지도 말고, 물속 같은 데는 들어가거나 하지도 마.”

“네.”


동생의 퇴사.

무작정(無酌定)으로 작정(作定)한 퇴사가 아니었다.


무작정(無酌定) 작정(作定)한 퇴사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생각했다.

퇴사는 하지 못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무작정(無酌定)을 작정(作定)하고 살리라.

순간을 남김없이 호흡하고 느끼겠다. 지금, 이 순간을.


이어폰을 꽂고 오랜만에 끄집어낸 곡.


난 한 번쯤은 저 산을 넘고 싶었어.

그 위에 서면 모든 게 보일 줄 알았었지.


하지만 난 별다른 이유 없어.

그저 걷고 있는 거지.


해는 이제 곧 저물 테고

꽃다발 가득한 세상의 환상도 오래전 버렸으니


또 가끔씩은 굴러 떨어지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건 난 아직 이렇게 걷고 있어.


- 신해철 「그저 걷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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