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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Jun 03. 2024

꽃처럼,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친다.

그 결과가 자유가 아닐지언정, 스스로 움직인다는 시작이 자유(自由)

DJ Okawari의 「Flower Dance」를 듣다 보면 눈물이 난다. 선율에 귀를 기울이며 눈을 감으면 코스모스가 그려진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바람에 몸을 맡기며 「춤을 추는 꽃」.


꽃은 발이 없다. 꽃이 매달려 있는 줄기는 땅에 박힌 뿌리에 붙들려 있다. 스텝이 불가능하다. 꽃은 그저 바람에 흔들릴 뿐,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래서 꽃의 춤은 춤이 아니다.


꽃의 춤이라, 춤추는 꽃이라. 그저 그 흔들림을 사람의 시선으로, 인간의 입맛 대로 그럴싸하게 꾸민 것일 뿐. 제 의지로는 어디로도 갈 수가 없고 어떻게도 움직일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꽃이 춤을 춘다는 비유는, 그래서 꽃에게는 참 잔인하다.


사람도 별반 다르지 않으면서 말이다. 다리와 발이 있어 스텝을 밟고 팔과 몸뚱이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간. 덕분에 춤은 추겠지.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중력을 거역하지 못한다. 땅의 힘에서 벗어나 스스로는 하늘에 오를 수 없는 사람도, 따지고 보면 대지에 붙잡혀 있는 꽃의 운명과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저 홀로의 힘만으로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의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Flower Dance」를 들으며 자갈로 덮인 마당의 잡초를 뽑다가 문득 마음이 움직인다. 한줄기 가는 바람에도 휘청이는, 한줄기 가는 바람보다도 더 가느다란 여린 풀잎이, 자갈을 밀어 올리고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제 움직임과 운명을 쥐고 흔드는 ‘그 바람’을 만나기 위해서, 바람에 ‘흔들리기라도’ 하기 위해서, 잡초 싹은 스스로 무게의 몇천 배도 더 넘을 자갈들 틈을 애써 비집고서 얼굴을 쳐든다.


그리고 피워낸다. 볼품없고 그래서 이름도 잘 모르는 예쁘지는 않은 꽃을.


사람도 풀꽃과 다르지 않다.


잡초가 ‘체념’을 걷어내고 ‘고개’를 내밀 듯,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친다. 바람에 흔들림이 운명일 바엔, 닻줄에 매달려 멈춘 그대로 웅크린 채 멀미하지 않는다. 결국은 중력에 붙들려 있더라도, 그래도.


‘풀잎’이 그러는 것처럼 ‘돛’으로 바람을 받아내고 바람의 힘을 타고 달리며 울렁거림을-흔들림을 ‘즐기며 춤춘다’. 꽃이 땅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것처럼 배도 바다를 박차고 날아오르진 못해도, 그 자리에 가만히 멎어 있지는 않는다.


바람이 시키는 대로 춤이라도 추려고, 살아있음을 증명하려고, 풀꽃처럼, 완전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스스로 말미암기(自由)’ 위해서. 자유(自由)란, 스스로(自) 말미암는(由) 것. 말미암는다는 건, ‘원인이며 근원이 되는 것’. 자유는 결과가 아니다. ‘결과가 자유로움’을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작한다는 ‘근원이 자유로움’이 자유(自由). 그 결과가 자유가 아닐지언정, 스스로 움직인다는 시작이 자유(自由)다. 쇠창살을 뜯어내지 못하더라도 쇠창살에 손을 뻗어 움켜쥐는 순간, 갇힌 자는 자유로운 것.


뿌리에 묶인 채로라도, 안간힘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잎을 펼치고 하늘을 마시는 풀꽃처럼. 자유롭게.


꽃처럼,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친다.

그게 어디든, 가보는 거다.

예쁘거나 화려하지 않은 작은 꽃을 피워보는 거다. 피우다 말아도, 피우지 못해도 그래도 좋다.


꽃처럼 사람도, 어느 날에는 지겠지만.

그 순간까지는.


꽃처럼, 닻을 올리고 돛을 펼친다. 자유(自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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