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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inon Jun 17. 2024

가볍지 않은 가벼움, 개미와 먼지

누추하고 초라하던 젊은 날의 초상

#1. 심장 속 정물화 두 점     


  누구에게나, 겪었던 시간과 공간은 모두가 같은 무게로 남지는 않는다. 기억 내지 추억의 어느 한 갈피가 더 묵직한, 그래서 그 빛깔이 더 도드라지게 짙은 시간과 공간이 있게 마련. 9살에 처음 만났던 짜장면,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었던 그 황홀한 맛. 첫사랑에게서 받은 답장, 그 겉봉을 뜯어 펼치던 순간 손끝의 바들거림. 어머니 장례를 마치고 집 앞 골목 모퉁이를 돌 적, 눈물에 번져 뿌옇던 회색 달빛. 그렇게 심장 속 정물화로 남은 오감(五感)의 흔적은 깊고도 무겁다.

     

  때로는, 그 깊고도 무거운 기억의 한 페이지가 너무도 가벼운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아이러니를 마주할 때도 있다. 참으로 하찮거나 가볍거나, 둘 다이거나 한 그 무엇인가가 머리를 쿵 치는 순간이 심장 속 정물화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참 우연찮게도 그 두 번의 찰나는 삶이 고달파 어깨가 가장 무겁던 때였으니... 고흐와 베토벤. 그 처절하여 불꽃같은 삶이 인류가 멸망하기까지 남을 그림과 음악이 된 것처럼,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의 순간은 신경 말단의 감각을 극도로 섬세하게 하여, 범상한 개인의 삶에 깊숙이 스미는 영감(靈感)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2. 개미부지런함의 관성(慣性)     


  스물여덟의 이등병 계급장은 무거웠다, 아주 많이. 한참 늦은 나이의 입대(入隊)란... 그런 것이다. 제때 들어가도 갑갑할 그 불편한 공포는 한 살 한 살 늦을 때마다 제곱이 된다는 사실을 흠뻑 느끼며, 신병교육대와 자대의 기상나팔소리를 맞곤 했다. 훈련 중 부상으로 남들보다 먼저 전역한 주제에 감히 군 생활의 치열함을 언급하기는 부끄럽지만, 아무튼 늦깎이 이등병은 나름 무척 서러웠었다.     


  자대 배치 후 한 달이 지난 주말. 늦여름 오후 뙤약볕 아래, 모포를 빨랫줄에 널고 난 어리바리 중대 늙은 막내는 잠시 내무반 선임들의 독사 같은 눈초리를 피해 그늘에 숨어 담배를 죽이고 있었다. 1초가 1년처럼 느껴지던 신입 이등병 시절, 잠깐의 휴식은 거꾸로 1년이 1초 같았다. 그 짧은 혼자만의 자유 속에서 담뱃재를 털던 이등병의 시선은, 모랫바닥을 부지런하게도 누비는 개미떼에 고정되었다. “너희들도 땀을 흘리는구나? 덥지? 물 좀 줄까?”라는 엉뚱한 동병상련이 들 정도로, 코딱지만 한 개미들은 열심히도 움직이고 있었다. 개미들의 유전자에는 ‘쉬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전방 부대 연병장 구석에서 스물여덟 번째 맞는 여름의 어느 날에 비로소 깨달았다.     


  부지런함의 관성. 쉬지 않고 그저 끝없이 걸어가는 개미떼들 위로 ‘좀머 씨’가 떠올랐다.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소설 ‘좀머 씨 이야기’에서 그려낸 그의 모습이 그랬다. 평생을, 하루 종일을 그냥 걷기만 하다가 홀연히 호수 속으로 자진(自盡)해 버린 ‘좀머 씨’를 우리말로 풀어낸 역자(譯者)는 번역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독히도 순결하고 극단적으로 완고하게, 전생에서부터 저승까지 이어지는 인생길을 끝까지 <걸어서> 가버린 그가, 살았지만 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는 그가 나에게 던져준 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살아라>였다.」     


  목적 없이 걷기만 했던, 걷는 것 그 자체가 삶의 이유이며 목적이었던 ‘좀머 씨’와 개미들... 전혀 유쾌하지 않은 군 생활에서도, 그래도 누구나 한 가지 정도는 뭔가를 건져서 나온다고 했던가. 그 여름날 연병장 위 ‘개미’들, 그리고 그 ‘부지런함의 관성’을 가슴에 담고 전역하던 날에 몇 년 만에 다시 펼쳐 든 책 속의 ‘좀머 씨’. 그 둘은 그렇게 내 심장 속 정물화 한 점이 되었다.     


#3. 먼지게으름의 관성(慣性)     


  영어로 정물화는 “Still Life”... 그 단어를 처음 익히던 때, ‘멈춰버린 삶의 한 순간’을 정물화라 칭한 그 탁월한 묘사에 퍽 감탄했었다. 하지만 감탄은 오래가지 않는 법. 그리고 정물화는 정물화던가. 군문(軍門)을 나서며 가슴에 새겼던 그 ‘부지런함의 관성’에 대한 감탄과 각오는, 그대로 정물화인 채로 멎어버렸다. 그렇게 멈춰버린 발걸음은 차곡차곡, 빠삐용처럼 ‘인생을 낭비한 죄’를 저지르며 시간을 삼켜갔다.     


  어느새, 서른 중반이라는 나이는 그 자체로 머리꼭지를 짓누르는 폭탄 같은 돌덩이였다. 스물여덟의 이등병 계급장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몇 푼 월급이라도 받았던, ‘이등병이면 어떠랴...’ 그래도 소속과 직급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던 그 시절로 차라리 돌아가고픈 늦깎이 취준생의 좌절과 자기 연민은, 이내 낙방과 나태의 무한궤도에 스스로를 던져버리게 되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습기 찬 고시원 골방 안에서 서른다섯 백수는 나락 속에 푹 잠겨 있었다. 헤엄쳐 나올 의지도 힘도 없었기에, 그 절망의 지하실 바닥은 원래부터 당연하게 운명으로 주어진 보금자리 같았다.     


  오후 1시 기상. 밥 대신 술이 당긴다. 슬리퍼를 끌고 터덜터덜 나선 골목길. 한심하고 처량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낯익은 길고양이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서 들어선 단골 슈퍼에서 오늘도 소주 두 병을 집는다. 계산대에 서는 순간은 언제나 부끄러움과 죄의식의 클라이맥스. 안주 없이 매일 강술만 처마시는 취업 낭인, 아니 무늬만 취준생인 폐인이 그날따라 안쓰러웠나 보다. 주인 할머니는 잠시 기다리라며 가게 안쪽 방에서 식어버린 김치전 몇 장을 은박지에 담아 내오셨다. 그 순간, 스물여덟 부대 연병장에서 만났던 개미떼들이 달려들어 온 몸을 물어뜯는 것 같은 수치스러운 아픔. 골방으로 돌아와 김치전 한 점을 입에 구겨 넣고, 소주 한 잔을 꿀꺽하다가 폐인은 울기 시작했다. 세상 더없이 초라하고 찌질하게 엉엉엉...     


  울다 잠들다 깨어난 것은 뉘엿뉘엿 해가 넘어갈 즈음. 발밑에 쓰러져 굴러다니던 소주병에서 흘러나온 알코올. 몇 달 만에 새삼 그 냄새가 역겨웠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몸을 일으켜 책상 위 스탠드 조명을 켰다. 몇 달 만에 빛을 받은 독서대 모서리의 이음쇠는 짜증스러운 듯 기지개를 켜며 알코올 중독자를 반짝 노려보았다. 그리고...     


  독서대 위, 몇 달 동안 잠자고 있던 수험서 위에 수북하게 두터운 먼지를 손가락으로 주욱 훑어 내렸다. 부스스 흩어지며 날리는 먼지... 들... 아... 나는 감히 너희들을 닦아 치워 버릴 자격이 없구나... 너희는 이렇게 쌓이기라도 했지. ‘게으름의 관성’은 이토록 켜켜이 쌓이며, 시간 속의 ‘이룸’을 만들었는데... 난... 그 몇 달 동안 먼지만도 못한 존재였구나. 그랬구나.     


  작가 이외수가 어느 글에서 회고한 말이다. 그가 대학 입학식에서 듣고 ‘세월’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학장의 기념사 한 대목.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입니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라는 상투적 표현은 그동안 얼마나 무책임한 것이었는지. 부끄럽고 추하고 보잘것없더라도, 한 인간이 살며 밟아가는 세월 위에는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이 남는 것.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자랑스러우면 자랑스러운 대로 삶의 조각들은 있는 그대로 세월 속에 쌓여가는 것. 먼지 뭉치가 남긴 ‘게으름의 관성’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그 쌓여가는 세월의 층층계단을 헛되지 않은 발걸음으로 계속 올라야 한다는 것. 그 강렬한 자각... 삶 속, 두 번째로 만난 가벼운 것이 심장에 남긴 정물화는 그 ‘게으름의 관성’인 먼지 뭉치였다. 그리고...     


  바로 그날 이후, 취업을 하기까지... 단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4.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것들에게     


  사무실 건물 옆, 흡연 장소 보도블록 틈새에서 매일 개미들을 만난다. 물론 17년 전 파주 어느 부대 연병장의 그 개미들은 아닐 테지만, 다시 보는 녀석들은 살짝 반갑기도 하고, 여전히 안쓰럽기도 하면서 스물여덟 이등병 계급장의 시절을 잠시 떠오르게 한다. 행군 도중 흙 묻은 식판 속, 모래알 섞인 밥알도 마시듯 삼키던 배고프던 그때.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밑바닥을 치던 그때의 추억들은, 지금 누리는 것들에 대한 큰 감사와 작은 만족을 일깨운다. 그리고 ‘계속 걸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좀머 씨’를 기억에서 불러낸다. 

   

  일요일 저녁, 대청소. 가구들 위에 일주일 사이 쌓인 얇은 먼지 층도 10년 전 어느 고시원 골방으로 잠시 생각의 차원을 옮긴다. 몇 달 간의 알코올 중독을 한 방에 끝내버린 먼지 뭉치.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는 반성과 자각은, 부끄러움으로 한 인간을 각성시키면서, 동시에 그 부끄러움조차 삶의 한 자취로 끌어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동시에 준 것이다.     


  그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둘, 개미와 먼지는 각각 부지런함과 게으름의 ‘관성’으로 심장에 새겨져서 다시금 오늘의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삶 속 가장 누추하고 초라하던 순간에 그려진 두 장의 정물화. 그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개미와 먼지에게, 그래서 참 많이... 감사한다.


#5. 그리고... 정물화 속 풍경화     


  며칠 전, 지인의 SNS 계정 프로필 사진(!)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었다. 참 예쁜 정물화 속에 걸린 멋진 풍경화(자세히 보니 어느 카페 내부 사진이었다만). 흔치 않은 정물화 속의 풍경화를 맞닥뜨린 순간에 들었던 생각. 누구에게든 마음속 “Still Life”로 머무는 삶 속 정물화 안에는, 그 순간의 기억과 깨달음을 넘어서 산으로, 오솔길로, 호수로 향하는 꿈을 담은 풍경화가 걸려 있다는 것을. 그러하기에 각자의 삶 속 정물화는, 거기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너머로 열린 세상에는, 더 넓고 탁 트인 풍경을 시원하게 감싸는 바람(風) 소리 같은 바람(願)이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지인의 멋진 촬영 솜씨에 덧붙여 깊은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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