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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븐 킹 Jan 15. 2021

껌종이 추억 소환


어제 직장 동료들과 잡담을 하다 퇴직하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어느 선생님의 말에 나와 다른 동료는 학을 떼듯(여기서 학은 말라리아를 한자어로 학질이라고 한다) 소스라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옆 동료의 말을 빌리자면 친정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가셨다가 돈을 많이 벌어왔지만 몸을 다쳐서 시골 외할머니 댁의 가게로 들어갔다고 한다. 일명 점빵(경상도 사투리)으로.


나보다 열 살 정도 어린 그녀는 내가 담배 농사 이야기를 꺼냈더니 자기는 그 담배 진이 손에 묻었는데도 몹시 즐거웠단다. 하지만 벌레를 무서워해서 다시 시골로 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나 역시도 그 지긋지긋한 농사일이 싫을뿐더러 지렁이, 거머리, 벌레 등이 그녀처럼 싫어서 절대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내가 어렸을 때 농촌은 정말 가난했다. 60~70년대는 우리나라 전체가 그랬을 것이다.

특용작물을 재배한답시고 어느 날부터 담배농사를 지었는데 뙤약볕에 담뱃잎을 따서 지푸라기로 묶어 말리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연한 검은색의 담배 진이 손에 묻으면 몇 날 며칠을 끈적이며 살아야 했다. 씻어도 잘 닦이지 않는 이상한 성분으로. 수매를 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말려야 하는데 너무 말렸다 싶은 것은 쌓인 눈 위에 펼쳐 놓고 수분을 흡수하게 하는 일도 했는데 눈 온 날은 가끔 그 짓도 해야 해서 힘들었다.


그나마 우리에게 껌이 있어 즐거웠다.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일의 고달픔을 껌으로 달랬는지 모른다. 마을에 있는 점빵(점방)에서 사 온 껌은 그 시절에 비싸서 한 통을 사 와 형제들이 나눠 먹고 씹던 껌을 안방 벽지에 붙여놓았다가 다음에 또 씹고를 반복했다. 코로나 세상에 이 이야기는 젊은이들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가끔 자기가 씹던 껌의 위치를 까먹어 형제 것을 뜯어먹다가 성질 까다롭기로 소문난 언니에게 걸려 혼난 적도 여러 번 있다. 보통 집집마다 자식이 있는 집은 그런 광경으로 벽지가 조금씩 쭉 뜯겨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길바닥에 씹다 버린 껌을 주워 씹기도 하던 시절이다.


무슨 연유로 내가 껌종이를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 집 장롱에는 어렸을 때 모았던 껌종이가 한 움큼 있다. 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사진 넣었던 후지필름이라 쓰여있는 비닐봉지에 소중하게 넣어져 있다. 펼쳐놓고 사진으로 찍어 추억을 소환해본다.

롯데껌과 오리온껌(2개)

나는 해태 팬이라서 프로야구 경기도 열심히 응원했다 지금은 기아로 바뀌었지만 그때 난 해태 마니아였다. 껌은 아무거나 씹었지만 그래도 해태 껌에 더 손이 갔다. '한마음, 들국화, 모든이껌, 커피껌, 숙녀껌, 아카시아껌, 수노아, 향기나껌, 쥬시후레쉬, 들국화 등등'


우리 추억의 껌이다. 내 친구들이 이 글을 본다면 탄성을 지르며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관하고 있을 줄 아무도 모를 테니 말이다. 이것들은 내 일기장이며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통신표, 중, 고등학교 성적표, 상장 등을 시집올 때 챙겨 와서 고이 장롱에 넣어둔 덕택이다.

해태껌

껌종이를 보니 생각보다 화려하다. 약간 촌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겹다. 꼬맹이던 내가 아들을 장가보내기까지 했으니 세월 참 빠르다. 그 시절에는 지금의 코로나가 있을 것이라 상상도 못 했는데. 벽지에 붙여놓고 떼먹었던 껌 생각을 하면 얼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데 꼭 원시시대에 살다 온 느낌이 들어 아들 세대에게는 말도 못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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