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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Dec 08. 2021

보말칼국수와 밥심


 생애 첫 한라산 등반을 마친 어느 화창한 오후. 등산 초보이기에 정산 등반 코스가 아닌 영실코스를 통해 윗세오름 대피소까지만 갔다가 돌아왔다. 코스는 길지 않았지만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 꽤 고된 산행이었다. 하지만 산 위에 올라 본 풍경은 내가 들인 품에 비해 너무 황홀해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신선놀음하는 듯한 절경을 뒤로하고 내려오자 급격하게 허기와 피로가 몰려왔다. 발걸음이 무겁고 점차 말수도 줄어 친구와 별 대화 없이 타박타박 걸어 늦은 점심 식사를 위해 향한 곳은 서귀포의 한 보말칼국수 가게였다. 육지에서는 보말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에 무척 생소했는데, 보말은 제주의 보편적인 식재료로 바다 고동이라 불리지만 제주에서는 주로 보말이라 한다.     


 처음으로 맛본 보말칼국수에 대한 기억은 ‘뭐 이런 영양덩어리가 있나.’였다. 칼국수 국물을 입에 넣자 5시간의 등산으로 인해 지친 몸 구석구석 따뜻한 국물이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한 숟갈 한 숟갈 먹을수록 실시간으로 힘이 나기 시작했다. 음식이 보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텔레비전 속 영양제 광고에서 영양제의 효과를 이미지로 표현하기 위해 영양제를 먹은 사람 몸에 순식간에 영양제가 빨간색으로 사악 스며드는 컴퓨터 그래픽 효과가 실제로 내 몸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보말의 영양이 혈관을 타고 몸 곳곳으로 뻗어가고, 눈이 번쩍 떠지는 그런 느낌이 정말로 들었다. 등산 중 감귤주스, 오메기떡, 주먹밥 등 분명 많은 걸 먹었는데도 마치 첫 끼 마냥 맛있었다. 너무 지쳐 식사 후 바로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밥을 먹고 나자 신기하게 나도 친구도 다시 힘을 내 늦은 저녁까지 관광하고, 바다 위를 물들이는 제주의 아름다운 일몰도 감상할 수 있었다.


‘아, 밥심이란 게 이런 거구나.’          


 태어나 처음 밥심을 체감했던 건 이날로부터 10년 전, 대학생 국토대장정에 참가했을 때였다. 그날따라 긴 코스와 푹푹 찌는듯한 날씨에 나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너무 힘들어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라는 순천만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앞 친구의 발꿈치만 보며 걸었다. 중식 시간이 되었지만 더위와 피로에 입맛이 없었다. 밥숟가락 들 힘도 없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숟가락을 든 손이 달달 떨려 국물이 다시 그릇으로 떨어졌지만 그전에 재빨리 입에 갖다 댈 힘도 없었다. 체념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자 옆에서 함께 식사하던 같은 조 친구가      


“밥 먹어야 돼. 내가 먹여줘?”


 라며 억지로라도 먹으라고, 안 먹으면 정말 먹여줄 거라고 옆에서 밥 먹는 나를 지켜보기까지 하며 재촉했다.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한국 대학생들이 하는 국토대장정에 참가하려고 여름방학을 맞아 한국에 왔다. 그는 덥고 힘들 때마다 우리에게 영어로 욕을 알려주곤 했다. 어릴 때부터 외국 생활을 한 탓에 말투나 생활방식이 나와는 많이 다른, 영어를 더 편하게 구사하는 그가 밥은 굶으면 안 된다고 서툰 한국말로 성화를 부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한국인이었다.

 

‘아 진짜 먹기 싫은데...’ 생각하면서도 지켜보는 친구 때문에 별수 없이 꾸역꾸역 밥을 먹었는데 웬걸, 더 이상 손도 떨리지 않았고, 다시 걸을 힘이 났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하루 8시간 이상 땡볕을 걷는 고된 육체 활동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20대 초반, 한창 체력이 좋았을 때니까 밥을 굶어도 그냥 배고프다고 생각했으면 했지 딱히 밥을 못 먹어 힘들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그 한 끼가 내게 반나절을 더 걸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는 것을 몸소 느낀 날이었다. 아무튼 이날부터 나는 밥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힘들 때면 힘듦을 보상하듯 맛있는 것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몸이 힘들 때뿐만 아니라 정신이 힘들 때도 마찬가지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 일주일 동안 고생한 내게 보상을 해주고 싶을 때, 너무 우울하고 자존감이 떨어져 동굴로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을 때, 혼자 방에서 울기만 할 때도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 진정되고, 잠이 오고, 한숨 자고 나면 고통이 그래도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 들어 다시 살 힘을 조금이나마 얻게 되는 것이다. 선경에 있던 괴로움과 근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후경으로 밀려나 다시 조금씩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느낌이다. 바닥 끝에 있던 나를 더 이상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힘, 그게 밥심이 아닐까.     


 국토대장정을 하며 육체적으로 가장 지쳤던 그날, 억지로 밥을 먹게 한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밥심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완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식사를 마치자 그제야 내 식판을 묵묵히 치워주던 친구 뒷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함께 한라산을 오르고, 보말칼국수를 먹은 친구도 10년 전 함께 국토대장정을 했던 같은 조 친구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도 이 친구와 함께 인천공항에서 그의 출국길을 배웅했었다. 그런 기억이, 그들과 함께했던 끼니가 모여 나를 살게 한다.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여러 가지가 있고, 밥심은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같이 괜히 우울한 기분이 드는 날은 제주에서 먹었던 따끈한 보말칼국수가 생각난다. 그날은 내게 육체적으로 에너지를 주는 음식이었지만 그날의 기억은 이제 정신적으로 힘이 주는 무형의 존재가 되었나 보다. 그날 가게에서 우리가 앉았던 자리, 내 맞은편에서 같이 보말칼국수를 먹던 친구의 목소리, 푸른 칼국수 국물, 그날 보았던 한라산의 절경, 바닷가에서 본 잊지 못할 일몰까지 아련하게 머릿속을 떠돈다. 정말이지 파란 제주 바다 한 번 보고, 보말칼국수 한 그릇 먹으면 힘이 날 것 같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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