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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결혼한 이유

- 헤어지지 말자 -

by 린ㅡ


생각났다. 당신과 결혼한 이유.




올해의 날들은 유난하게 고요히 냈다. 집 한 구석, 가만가만히. 무언가를 쉼 없이 그리던 오른손도, 무언가를 쓰려 초로하던 손도 겨우겨우 움직거렸다. 우울에 진득하니 절여진 피클처럼 마음이 뒤틀려선 어느 한 구석도 멋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결국 한 해 동안 마음속 감감한 터널 안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자책하거나 비난할 겨를조차 없었다. 나의 시간이 멈춘 만큼 나를 도려낸 시간은 금시에 달아나 버렸으니까. 알고 싶지 않아. 곯고 곪은 나를 누구알아채지 못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다, 그랬으면 하고 바랐다.


이제야 당신을 바라본다. 언제나 내 곁에 있던 당신의 마음, 그것을 가늠해 본다. 이젠 고요한 투정을 그만둘 때가 온 것 같아. 내 묵음한 투정이 당신에겐 얼마나 소란스러운 전쟁이었을까. 당신 뒤편에 숨겨둔 어둡고 축축한 당신의 일면은 과연 나보다 덜하다 말할 수 있을까.




그가 데이트 신청을 했다. 영화 보러 가자. 나랑 밖으로 나가자. 그가 말했다. 영화관을 두려워하는 아이 둘과 살아가는 덕분에 영화관 데이트는 나누기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버렸고. 12월 끄트머리, 누군가의 생일이 되어서야 영화관에 가볼까 생각한다.


아이들을 부모님 댁에 데려다주고 온 그는 내가 제일 좋아하던 옷으로 차려입고 먼저 와 서있다. 새 옷도 아니고 비싼 옷도 아니지만,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옷. 세탁할 때마다 세밀하게 살피며 고이 빨아 개어놓았던 하얀 니트.


나는 이것이 얼마나 상대를 배려한 인지를 안다. 늘 함께 지내는 이를 위해, 기꺼이 꾸미는 일. 별것 아닌 그것이 결혼하고 아이 둘과 함께 하고 나서는 얼마나 유난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는지, 잘 알고 있다.



결혼한 지 15년. 이제 당신과 마주하고 있으면 그 안을 채운 감정들이 자연스레 전해진다. 숨겨내려 애쓸수록 투명하고 선명하게, 더욱 절절하게도 도착하고 만다. 과연 내 것도 그랬을까.


악착같이 숨어있는 그 마음을 구슬리고 간질여 겨우 꺼냈다. 힘든 일이 있었다고. 이제 괜찮다고. 같은 직장에서 도망한 나는 이미 당신의 자리로 가 서있다. 조금도 통제가능한 구석이 없는 무력감, 무참히 짓밟히는 괴로움이나 고통 같은 것들. 도와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오늘은 양팔을 크게 벌려 꼭 안아줘야지. 세상으로부터 도망한 내가, 가진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샘솟는 슬픔을 꿀꺽 삼키고 활짝 미소하며 한껏 안을 수밖에. 그렇게 아물지 못한 당신의 상처들이 내게 옮겨오길 바랄 밖에.



같은 정류장에서 다른 버스를 기다렸다.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당신과는 당장의 목적지가 달라서. 언제나 그랬듯 하필 나의 버스가 먼저 도착하고 만다. 종일 잡았던 두툼하고 따뜻한 당신의 손을 놓았다. 뒤돌아 손을 흔들다 생각이 났다.


당신과 헤어지는 일이 싫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날마저도 그저 함께 있고 싶었다. 우린 가진 것이 없었고, 멋진 모양새를 가진 편도 아니었으며, 마음이 부리는 대로 상대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가 없었다. 볶음밥, 떡볶이, 커피우유 같은 것들을 반복했지만, 지겹지 않았다. 반복하고 싶었고 헤어지는 일이 싫었다.


그 마음이 겹겹이 쌓여 빈틈없이 들어차 더 이상 구겨 넣는 일마저 불가능해졌을 때, 결혼했다. 그 한 가지 이유가 전부였다. 당신과의 결혼.




집에서만 머물렀던 올해의 나날들도 당신 덕분이었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 않더라도 출근할 때 두고 간 당신의 마음 덕분에 너눅하게 숨어 멈추어 있을 수 있었다. 퉁퉁 부은 눈이나 오그라진 몸, 진창이 된 집 안을 마주하고서도 어떤 것도 내게 물어오지 않았다.


당신에게 집은, 내 곁은 어땠을까. 내 우울만 버려내느라 이기적인 우울자는 감히 당신을 생각하지 못했다.


탐욕스럽게 년 내내 우울을 부린 대가로 한없이 투명해진 당신과 헤어지고 나니, 하릴없이 눈물이 흘렀다. 미안함인지, 감사함인지 모를 못된 눈물. 버스에서 한바탕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가뿐하게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아름차게 울었다. 당신의 마음이 보드라운 것들로 그득해져 불투명해질 때까지 당분간은 울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열렬하게 울었다.


한 해 동안 정지버튼을 누르고 아껴둔 탓에 어느 때보다 힘이 세진 연말, 여느 때보다 단단한 응원을, 선연한 사랑을 주고 싶다. 이번에는 내가 당신에게. 더욱 온온하게, 전에 없이 양양하게, 캄캄한 새벽녘 출근하는 당신의 왼손에 꼭 쥐어주고 싶다.


된장찌개, 계란말이, 김 같은 것들을 반복해도 여전히 지루하지 않다면, 기어이 되풀이해도 좋다면, 우리 헤어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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