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고 없는 진심배송 -
"비가 오잖아, 기분이 좋아서 왔지."
초인종이 울렸고, 시어머니의 얼굴이 비쳤다. 시선을 돌린 순간, 너저분한 집의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열쇠를 가진 당신이 초인종을 택한 것은 두 손에 여유가 없다는 의미일 테니.
달려 나갔다. 대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불을 켜지 않는 집안은 어두컴컴했으며, 유난히 습하고 쿰쿰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 얼굴을 살피다, 비가 많이 내리기에 기분이 좋아 왔다고, 한껏 미소하며 들어오셨다.
양손에 든 두툼한 가방은 여전히 뜨듯한 국과 반찬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고단해 보이는 가방 위로 내내 주방에 머물렀을 당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싱싱한 것들이 그득하다는 전통시장을 찾아가 재료를 수레에 담아와선, 그것들을 넣고 집안 가득 습기 차게 하르르 끓여냈겠지. 우람하고 무거운 솥, 가냘픈 두 손목으로 그것을 올렸다 내렸다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바람이 이는 곳을 찾아 솥을 내리고, 한소끔 식으면 동동 떠오른 기름을 걷어, 준비해 둔 통에 넘치도록 담았을 테지. 식지 않게 튼튼한 보온가방을 찾아서는 안에 차곡하게 모두 담으려 넣었다 빼기를 수없이 반복했으리라. 그러고도 남은 틈엔 봉지에 담아 야무지게 동여맨 고춧가루와 고운 깨가 간신히 앉았다.
태생부터 아토피를 앓아 온 당신의 아들 곧 나의 남편을 위해 약재로 물을 달여주신 지 3년이 넘었다. 격주로 그가 아이들과 시댁을 방문하지만, 결혼할 때부터 연로하신 시할머니를 뵈러 매주 방문했던 터라 간혹 사정이 생겨 가지 못하면 허전하신 듯했다. 지난 주말엔 시댁의 약초옹달샘에 가지 못했고, 당신이 방문했다.
하필 눈앞이 하얗도록 비가 내리는 날. 함박웃음을 하고선.
나는 오늘처럼 당신을 맞이했던 어느 하루를 잊지 못한다. 봄에 사직을 하고 그해 겨울, 내 생일을 앞둔 주말. 시어머님은 생일상을 차려줄 테니 와서 먹으라고 남편에게 전했다. 그때 나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형상으로 집안에서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당신 앞에서 감히 축축하지 않은 눈으로 탐스럽게 음식을 삼켜낼 용기가 없었다. 도저히.
마음이 몹시 불편했지만, 가지 않는 일보다 가는 일을 후회할 거라 생각했고, 결코 그래선 안될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내가 두려웠다.
며칠 뒤, 나도 모르게 도착한 나의 생일날. 시어머님이 아이들의 등교시간 즈음 집에 도착했고, 입을 다물지 못한 묵직한 가방이 당신의 두 손에 겨우 들려 있었다. 꼭 오늘처럼.
아이들을 배웅하고 나서 찬들을 하나씩 꺼냈고, 내가 언젠가 좋아했던 음식들로만 가득한 생일상을 차려주셨다. 미역은 보조출연하는 전복미역국, 매콤맛 샤워를 마치고 불맛 미스트를 뿌린 낙지볶음, 손수 다듬어 비쭉비쭉 화가 난 더덕무침, 큰 쟁반에 랩으로 서둘러 덮어온 해물부추전. 고이 마음으로 상보를 덮듯 감싸 달려온 음식들.
"조금이라도 먹고 오늘은 밖으로 나가봐. 날씨가 좋아. 필요한 것도 사고. 난 갈게. 나오지 마."
그렇게 내 두 손을 포개서는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넣어주셨다. 나는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배웅은 했는지 등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을 울었던 것만 기억한다.
그날도 당신은 날씨가 좋다고 했다. 12월, 새파란 한겨울의 한가운데 날, 시리도록 화창한 날이었다.
오늘과는 정반대로.
울고 나서도 식지 못한 미역국을 비우고 밖으로 나갔다. 용기백배한 용돈을 그러쥐고. 당신의 진심 어린 위로에 대한 보답으로 오늘만큼은 잘 먹고 밖으로 나서도 보고, 당신이 쥐어준 용돈까지 응당 사용해야 할 것 같아서. 당신의 위로를 무사히, 정성껏 소화해내고 싶었다.
종일 쓰지 못해 쥐고만 있던 너덜너덜한 지폐 두 장과 냉장고를 가득 메운 음식들. 그리고 그 겨울날, 따스히 감싸주던 당신의 꽁꽁 언 두 손의 감촉을 잊지 못한다. 따뜻한 생일상은 핑계였을 뿐, 밖으로 나오지 않는 철부지 며느리가 걱정되어 달려오셨다는 것을 안다. 걱정하는 당신의 마음을 안고, 내 맘을 안아주러 오셨던 것을 알고 있다.
말로 나눌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사랑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종일토록 깨달았다.
그날처럼 오늘도 당신의 시간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득하고 든든한 사랑의 맛. 하루 종일 입안에 머금고 삼켜내지 않았다.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삼켜내기 아까워서. 아깝도록 고운 사람, 당신에게서 나는 살아내는 방법을 배운다. 사랑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