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 둘이 있는 집안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어느 즈음에는 내가 아빠를 닮았다고 했고, 다음의 어느 즈음엔 엄마를 빼어다 박았다 했다. 지금에서야 자못 살펴보니, 나는 아빠를 많이도 닮아있다.
놀란 토끼눈의 형태부터 고약하게 궁상맞은 구석까지, 보이는 곳에서부터 비밀히 숨겨둔 부분까지.
언제부턴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아빠의 일면을 당신의 마음으로 가분히 가늠해 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분통이 터진다는 엄마의 설명이 끝나면 기어코 그의 숨겨둔 마음을 좇아 해석해 전하곤 했다. 물론 그것이 진정 엄마의 분노포인트가 되기도 했지만.
나와 같이 말을 내지 못하는 아빠를 보며, 철갑을 두르고 숨긴, 내게만 비치는 것 같은 그 얄궂은 속을 가지런히 꺼내어 주고 싶었다. 소리 내어 주고 싶었다.
꺼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쉬이 꺼내는 이들 못지않게 끓어오르는 마음이 있다. 그것이 분노든 열정이든, 타오르는 모양새나 들끓는 온도는 그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심히 알려주고 싶었다. 꺼내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도 매한가지라는 것을. 활활거리는 마음이 갑작스레 끼어들어 쉬이 사그라들지 않고, 마음속에 감춰둔 비슷한 것들을 모아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꺼내는 방법을, 세밀히 말하자면, 당신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꺼내는 법을 몰라 여태 꺼내지 못했다는 것을. 무심결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아빠를 꼭 닮았으니, 당신의 음고를 고대로 따라 소리 내어 당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꺼내주고 싶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도, 당신의 마음도 상하지 않게, 속을 판판하게 꺼내어 사랑을 고백하듯 아롱아롱하게 읊어내고 싶었다.
나는 당신과 그 곁의 당신을, 아빠와 엄마를, 같은 무게와 같은 부피로 사랑한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공명정대하고 무색무취한 마음해설가가 되어 소리 내지 못하는 사랑을 대신 낭랑하게 낭송해주고 싶다. 당신이 잔잔하게 소리 낼 수 있을 때까지, 호젓하게 사랑을 하고 싶다.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맞았고, 외가에 가자고 졸라댔다. 대게 일 년에 두어 번, 이틀밤을 자고 오는 일정이기에 서로의 얼굴을 살피고 함께 밥을 먹는 일만 하기에도 바듯했다.
아이들이 잠들고, 아빠와 내가 거실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묵연한 성격이 같았고, 미소한 얼굴마저 닮았다. 당신과의 적막한 시간은 불편하지 않았고, 충만하게 고요한 그 시간을 좋아했다. 당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림, 그만두지 마."
많은 것들이 탈락되고 생략된 문장. 약한 것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남은 간략하고 강인한 문장. 미약한 것들에 정이 많은 나로서는 눈물방울이 오소소하게 떨어질 준비를 마친 문장. 철갑을 두른 당신의 마음 밖으로 이 한 문장을 꺼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꼭꼭 눌러 담아 기어코 내게 전하고 싶었던 말, 어쩌면 둘의 시간을 오래도록 기다렸을 간절한 문장. 한 구절이 해석되기 전에 당신의 마음이 먼저 들어와 새치기를 한 탓에 소화되지 못한 문장엔 답을 하지 못했다. 입을 모으고, 미소진 당신의 입꼬리를 따라 초승달 모양으로 떨리는 입술을 겨우 모았다.
모아야지. 닫아야지. 그래야 흘러넘치지 않을 테니까.
아빠는 말수가 없는 경상도 사나이므로 나는 당신의 어린 시절을 알 방법이 없었다. 먹을 것이 없어 풀이나 나무껍질을 먹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과 고등학교 때 숨어 그림을 그리다 한참을 맞고 창고에 갇힌 뒤로는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언젠가 우편으로 전시회 초대장이 도착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친구라며 아스라이 미소했다.
평생을 어느 자동차회사의 노동자로 생계를 겨우 이어가던 아빠의 두꺼운 손바닥 위에 놓인 초대장을 보며, 난 의아했다.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나는 한껏 기름이 밴 남색 작업복을 입은 당신과 오래도록 초대장을 바라보던 당신의 쇠잔한 눈빛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무심히 읊던 당신의 우글우글한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사직을 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단연 당신을 생각했다. 부모님이 가장 바랐던 국세공무원을 그만두고 그림이라.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했고, 엄마에게 물었다고 했다. 아이가 미술을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부모님은 진로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그런 언급은 전에도 많았으므로 반사적으로 대답했다고 했다.
"형편이 어려워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엄마가 하교한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고백하기에, 그 슬픈 두 눈을 바라보며 씩씩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나 공부할 거야. 그림 절대 안 해."
그렇게 선언했던 것을 20년이 지나 꼬약꼬약 하고 있다. 그것으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유명세를 타는 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그치게 하는 법을 모를 뿐. 어떻게 멈추어야 할지 알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아빠에게도 그려보자 했다. 전혀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어렸을 땐 끄적거리는 일이 참으로 재미났었는데, 수없이 맞고 창고에 갇히고 나서는 잊었다고 했다. 버렸다고 했다. 돈을 벌어야 했으니 전장에 던져진 사람처럼 돈을 벌었다고, 그땐 모두 그렇게 살았다고, 하필 미소를 지었다.
퇴직을 하자마자, 아빠는 두툼한 손에 연필 한 자루를 쥐고 그림 한 점을 그려냈었다. 어느 책 귀퉁이에 있던 조그마한 사진을 보고 확대해 그린 것인데, 근사했다. 그것을 완성하고 깨달았다고 했다. 이제 이것이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을, 불숙한 감정이 일어 다시는 하지 않을 거라 했다.
즐거움을 잃어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그래서 생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재미가 없고, 적적하고 허망해지는 것이라고. 나의 인생에 그리는 일이 여전히 즐거움이라면 결코 버리지 말라고 전했다. 음절마다 당신 안의 슬픔을 꾹꾹 눌러 담은 탓인지, 간절함을 묵직하게 얹은 탓인지, 느릿했고, 저릿했다.
한참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겨우 당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와 꼭 닮은 당신의 두 눈을 보며 답했다.
"알았어."
우리는 언제나처럼 같은 공간에 앉아 각자의 미소가면 뒤에 숨어있다. 나는 당신을 꼭 닮았으므로, 당신이 철갑으로 둘러 숨겨둔 마음이 속절없이 보인다. 아우성치며 꽉 들어찬 나와 같은 마음들이.
오늘 올돌한 마음 하나 담담하게 내게 꺼내주었으니, 다음에도 간간이 꺼내어주길. 나는 당신의 어떤 마음도 꿀꺽 삼켜낼 용기가 있는, 당신의 멋진 첫째 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