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애가 싫었다.
"아빠 친구 아들이야. 너랑 나이도 같고 친구잖아, 친하게 지내"
아빠는 나를 은근히 그 애 가까이로 떠밀었지만 나는 그 애와 친해지기 싫었다. 그 애가 손버릇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 내 워크맨을 훔쳐간 애가 그 애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애의 엄마였던 아빠의 '친구'도 왠지 꺼림칙했다.
아빠가 지은 상가를 돈으로 정산받지 못하고, 쥐구멍 만한 상가 임대로 대신 받았을 때, 우리 가족은 당시 살던 아파트를 떠나 방 한 칸짜리 허름한 빌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창문을 열면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먼지가 소복이 쌓인 전봇대 줄들 뿐이었다.
'아파트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남산까지 보였었는데'
하며 창문을 닫았다. 그곳 화장실에는 세면대가 없어서 바닥에 쭈그려 머리를 감아야 했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살던 세간살이를 그 작은 빌라로 모두 옮겨 놓으니 안 그래도 좁은 집이 미어터졌다.
엄마는 그 쥐구멍 만한 임대에 적성에도 맞지 않는 식당을 열었다. 닭내장탕 전문점. 왜 하필 재수 없게 고기도 아니도 내장을 팔았을까.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엄마도 별생각 없이 고른 메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와보면 당시 우리 가족 꼴과 참으로 딱 맞는 메뉴라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그 애의 엄마, 그러니까 아빠의 친구도 엄마의 식당에서 두 칸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가게는 가장 구석진 곳에 있어서 엄마의 가게에 가려면 그 집은 꼭 지나쳐야 했는데 그 식당에는 소주를 마시던 아빠가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나는 항상 눈이라도 마주칠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잰걸음으로 그 식당을 지났다. 한 번은 엄마의 식당 일을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던 아빠가 그 집에서 대걸레질을 하는 모습을 나는 멍하게 바라본 적이 있다.
그즈음에 엄마는 손목을 그었다. 어느 날 막내 고모가 신발도 못 벗은 채로 급히 우리 집으로 들어와 방에 있던 엄마를 병원으로 데려간 것을 안다. 식당은 1년을 가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우리 가족은 허름한 빌라를 떠나 더 허름한 원룸 반지하로 쫓기듯이 이사를 갔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더 이상 닭내장탕 식당 딸이 아닌 것에 안도했고, 그 애 엄마의 식당에서 소주를 마시던 아빠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내가 무언가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문득 그때를 떠올리며 생각해 보았다. '그 애가 손버릇이 나빴던 이유는 그 애 엄마가 손버릇이 나빴기 때문일까?' 하고.
나는 이제 확실히 이해한다. 지금까지도 엄마의 왼팔에 주렁주렁 인 팔찌는 엄마의 몸에 난 상처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가리기 위한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엄마에게는 어느새 팔찌가 가장 좋아하는 액세서리가 되었지만 그 뒤에 가려진 상처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올해 엄마의 생신에
"엄마는 팔찌를 가장 좋아하잖아"
라며 팔찌를 선물한다.
엄마는
"응, 엄마는 팔찌를 제일 좋아하지"
라며 팔찌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