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歌痕26. 강릉에서 수제버거를 먹다, 드디어.

함께여서 땡큐~

by 이치혜

강릉 강문해변 앞에 수제 햄버거집 'Cafe, Paul & Mary' 가 있다.

나는 지난 십 년 동안 이 집 햄버거를 세 차례나 먹어보려다가 실패했던 경험이 있다. 정확히는 실패라기보다는 그냥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못 들어간 것이다.

image.png steemit 사이트에서. 고맙습니다~

왜냐고? 그런데 이 집이 참 묘한 게, 나 같은 사람이 혼자 들어가기엔 뭔가 부담스러운 거다. 글쎄, 일단 나는 생긴 게 완전 아저씨고. 그런데 이 집은 뭔가 젊은 사람들이 오는 곳 같고. 인테리어도 포크풍으로 깔끔하게 되어 있고, 창가에서 바다도 보이고. 그런 곳에 나 같은 아저씨가 혼자 들어가면 뭔가 어색하고 민폐일 것 같은 거다. 모든 이가 나만 쳐다볼 것만 같고. 그래서 매번 앞에서만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사실 겉으로는 ‘아, 나는 혼자 노는 게 좋아’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부끄러워하는 성격이다. 남들이 나를 쳐다볼까 봐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놈이라니까.

아, 십 년이라고 하니까 뭔가 대단한 일처럼 들리지만 그런 건 아니고. 강릉에 세 번을 왔는데 강문해변에 가면 저 집이 보이는 거다. 'Cafe, Paul & Mary'라는 간판이 기억에 남았고 수제 버거 카페라는 점도 신선했다. 아마도 그 옛날 포크 그룹 Peter, Paul & Mary에서 따온 이름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랑 포크 풍의 인테리어를 보면 더욱 그렇다.


지난주에 강릉에 출장을 갔는데, 일행 한 분과 같이 동행했다. 일 끝나고 안목해변에서 커피 한 잔 하자고 해서 갔다가, 내가 ‘아, 저기 햄버거집이 하나 있는데 한 번 가보실래요?’라고 했다. 물론 십 년 동안 못 들어갔다는 얘기는 안 했지. 창피하잖아.

안목해변에서 솔숲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서 도착했는데, 일행분이 ‘와, 여기 분위기 좋네요’라고 하더라. 그래, 드디어 들어간다. 십 년 만에. 들어가니까 진짜 좋더라. 창 너머로 강문해변이 쫙 펼쳐져 있고, 자연광이 들어와서 분위기가 아늑하고. 테이블에 앉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거다.


햄버거를 시켰다. 수제 햄버거라고 하는데, 패티가 두툼하고 재료도 신선하다. 일반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육즙이 입안에 가득 차는 게 정말 맛있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밥이랑 국물이랑 김치가 갖춰져야 한끼가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아저씨라 햄버거는 아무래도 간식 같은 느낌이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청량음료를 곁들였는데,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맛은 정말 환상이었다.

수제 버거와 감자튀김, 맥주 한 병이 놓여있는 테이블 너머로 바닷가 모습이 보이는 풍경..jpg

일행분께 고마웠다. 소원성취까지는 아니지만, 그래, 소원성취라 하지 뭐.

그분이 ‘여기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물어보길래, ‘아, 그냥 지나다니다가 봤지요’라고 대답했다. 십 년 동안 못 들어간 얘기는 끝내 하지 못했다. 좀 창피하잖아.

밖을 보니까 경포천 옆에 벤치가 줄지어 있고, 그곳에서 햄버거 들고 앉아서 먹는 사람들도 있다. 때마침 작은 고깃배에서 갓 잡아온 문어를 그물망에 담아 연신 근처 식당으로 옮기는 어부의 바쁜 웃음도 보았다. 이런 풍경을 보면서 먹는 햄버거라니, 정말 운치 있지 않나.


햄버거를 먹으며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 인생에서 혼자 해낸 일이 뭐가 있나 싶어서. 생각해보니까 진짜 없다. 누군가와 함께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거나, 누군가로부터 자극받아서 한 일들뿐이다. 심지어 누군가와 갈등하거나 경쟁하는 과정에서도 결국은 상대방의 존재가 나를 움직이게 한 동력이 되었다.

나는 늘 ‘혼자 노는 게 좋다’고 말해왔지만, 그게 사실은 용기 없음과 부끄러움과 소심함, 남의 눈치와 평가에 전전긍긍하는 못남을 멋있는 척 숨기려는 핑계였던 것 같다. 진짜 본성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적어도 그 근처에라도 있음으로서 보호받고 동료로 간주되고 싶어 하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나를 마치 계란판처럼 잘 감싸주고 보호해준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는 그들에게 항상 신세만 졌는데,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든든한 힘이 되어준 적이 있을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던 적이 있을까?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금은 재가 되었지만 한때는 누군가에게 절절히 뜨거웠던 존재.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십 년 만에 들어간 햄버거집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인생 참 묘하다. 햄버거 하나로 별 생각을 다 해본다. 물론 일행분께는 이런 얘기 안 했다. 괜히 철학자 행세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냥 ‘맛있네요’라고만 했다. 속으로는 '십 년 만에 드디어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고마웠지만, 고맙다는 말은 안 했다. 좀 창피하니까.

다음에 강릉에 다시 오면 혼자서도 들어갈 수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에 한 번 들어가 봤으니까, 뭔가 문턱이 낮아진 것 같긴 하다. 나이 들수록 이런 소소한 성취가 더 소중해진다.

강문해변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 그 작은 공간에서, 나는 소박한 인생 이야기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탄재처럼 말이다. 작고 예쁜 햄버거집에서의 하루였다.


https://youtu.be/QlqvVzY7eiE?si=lR8haL9xxzv52X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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