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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Oct 11. 2023

오펜하이머 & 드비어스 이야기

다이아몬드 1 - 역사 속 과학 이야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 Oppenheimer>가 인기가 오래가고 있다. 유대인 이민자 출신에 괴짜 천재 과학자 캐랙터, 원자폭탄의 아버지란 별명과 함께 전성기만큼이나 진폭을 가진 말년의 고초까지 그야말로 한사람의 인생에서 벌어지기에는 롤러코스트 같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가진 이야기다. 그런데 역사에 보면 몇몇의 오펜하이머가 눈에 띤다. 이번글은 오펜하이커가(家)의 인물 이야기다.


오크 리지 기지에서 J. Robert Oppenheimer, source: wikimedia commons by  doe-oakridge

오펜하이머는 '오펜하임(Oppenheim)에 사는 사람' 또는 '오펜하임에서 온 사람'을 의미하는 지역에 바탕을 둔 독일 성*이다. 오펜하임은 독일 프랑크프르트 남서쪽 37km 정도 떨어져 있는 라인강가의 지역이다. 이 성씨는 16세기 독일의 아쉬케나지(Ashkenazi) 유대인**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가족 성과 그 파생어는 서유럽과 동유럽 전역에 퍼졌다.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외에 눈에 띄는 인물이 몇몇 있다.


* 지역 성/이름을 따른 다른 성으로 히틀러(Hitler)가 있는데 이는 바이에른 방언 지하 강 "히들(Hiedl)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적용된 히들러(Hiedler)가 변형된 성이다.

**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그룹, 스파라드(Sefardí, 이베리아 반도 기원의 유대인)과 구별된다. 중세시대에 알자스부터 빙엔에 걸쳐 있던 라인란트에 주로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후손으로 추측됨.


오펜하임의 위치, google 지도


"아쉬케나지"는  당시 히브리어로 독일을 가리키는 말로, 따라서 문자 그대로의 뜻은 독일 유대인(German Jews)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11세기 ~ 19세기 기간 동안 많은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이 헝가리, 폴란드,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 국가로 이주하여 비독일어권 지역에서 특히 큰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현재 인구수는 전체 유대인의 80%를 차지하고, 약 8백만 ~ 1천 2백만명 정도라고 한다. 홀로코스트 이후 지리적 분포는 큰 변화를 겪어,  이 중 3~4백만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으며, 약 6백만 가량의 은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


Joseph Süß Oppenheimer, source: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Joseph Süß Oppenheimer, 1698? – 1738년)는 신성로마제국 시기 독일 유대인 은행가이자 뷔르템베르크 공국 카를 알렉산더의 궁정 유대인(기독교인 귀족을 위해 자금 상담, 자금대부업을 하던 유대인)이었다. 그는 경력 내내 수많은 정적을 만들어냈으며, 결국 카를 알렉산더 공작이 사망한 이후 모함받아 체포되어 교수형 당했다. 요제프의 흥망성세를 그린 소설  <유대인 쥐스>(리온 포이히트방거, 지식을만드는지식, 2023)이 있다.



막스 오펜하이머


막스 오펜하이머의 초상, 에곤 쉴레, 1910, 종이에 혼합, 45x29.9cm, source: wikimedia commons


막스 오펜하이머(Max Oppenheimer, 1885~1954)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미국 화가다. 15세의 나이에 빌덴덴 쿤스테 예술 아카데미( 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에 들어가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6년 체코 전위 미술가 단체인 프라하 그룹 'OSMA'(The Eight)에 가입하였다.


초기에는 독일의 막스 리베르만의 인상파 화풍에 영향을 받았으나, 1908년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와 에곤 쉴레 (Egon Schiele)와 함께 하면서 그는 오스트리아의 선두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 입체파 그리고 미래주의를 포함한 여러 다른 움직임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1908년과 1909년 비엔나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에 의해 공동 주최된 두 차례의 미술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그의 첫 번째 1인 전시회는 1910년 뮌헨의 모더니드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는 토마스 만과 아놀드 쇤베르크와 같은 동시대 문화적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려 유명했다.




어니스트 오펜하이머


De Beers at The Landmark, Central, Hong Kong source: wikimedia commons by DiaLMs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A Diamond Is Forever)"는 슬로건은 1948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독점하던 드비어스(De Beers)사가 다이아몬드 판촉을 위해 내놓은 광고문구였다. 이 한문장 때문에 1940년대 미국 결혼식에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비율이 10%에 불과하던 것이 지금은 80%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20세기 최고라고 평가받는 이 광고카피는 1971년 숀 코너리 주연의 007시리즈 7번째 영화는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라는 타이틀로도 사용됐다.


20세기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은 독일유대계 영국인 오펜하이머 가문(Oppenheimer family)이 장악했다. 이 가문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드비어스사를 통해 다이아몬드의 공급과 가격을 통제하며 세계 최대의 귀금속 상인으로 성장했다.


암스테르담 다이아몬드 공장을 찾은 어니스트 오펜하이머(우측) , 1945.12.3, Source: wikimedia commons by Koos Raucamp (ANEFO)


원조는 어니스트 오펜하이머(Ernest Oppenheimer, 1880~1957)다. 그는 독일 헤센주 프리트베르크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살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다이아몬드 브로커회사에 취직했다. 22살이 되던 1902년 다이아몬드 생산지인 남아프리카 킴벌리로 파견됐다. 그는 사업수완도 좋았고, 사교적이어서 미국인 광산업자 링컨 호놀드와 우정을 쌓으면서 미국 자본과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1917년 어니스트는 미국 은행 J.P.모건에게서 자금지원을 받아 요하네스버그에 앵글로어메리칸(Anglo American Corporation)이란 광산회사를 차렸다. 그가 영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시기에 독일계 유대인이란 자신의 뿌리를 감추기 위해 상호를 이렇게 지었다고 한다. 초기 자본금은 100만 파운드였다.


당시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회사는 영국의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Cecil Rhodes)가 설립한 드비어스였다. 로즈는 유럽의 유대자본가 로스차일드의 자금지원을 받아 남아프리카의 여러 다이아몬드 광산을 인수해 1880년 드비어스로 통합했다. 로즈의 경영원칙은 다이아몬드 생산 시장을 독점해 공급량을 조절해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는 경쟁사와 새롭게 개발되는 광산을 무차별로 공격해 카르텔을 유지했다.


1902년 남아프리카 트란스발 인근 프레미어 광산에서 대량의 다이아몬드 광맥이 발견되었는데, 그 광산의 주인은 드비어스 카르텔에 가담하길 거부했다. 대신 광산주는 어니스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니스트 오펜하이머는 미국과 영국 자본을 끌어들여 드비어스와 경쟁을 벌였다. 다이아몬드 공급이 늘어나면서 가격이 급락했다. 이웃 독일령 나미비아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어 반(反)드비어스 전선에 가담했다. 어니스트는 당시 광산도시 킴벌리의 시장에 선출되어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마침내 드비어스가 어니스트에게 손을 내밀어 매각을 제의했다. 1926년 어니스트는 앵글로어메리칸과 자신의 지분참여를 통해 드비어스를 인수하고, 3년후 드비어스 회장이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드비어스는 세계 다이아몬드시장의 90%를 지배했다.


어니스트는 카르텔을 철저히 관리했다. 독점이 곧 수익이라는 세실 로즈의 원칙을 철저히 이행한 것이다. 한 예로 미국인 해리 윈스턴이 드비어스를 거치지 않고 앙골라산 다이아몬드 원석을 독점하려고 했다. 이에 어니스트는 영국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윈스턴의 계획을 무산시켰다고 한다. 어니스트는 1950년에 중앙판매기구(CSO, Central Selling Organisation)를 만들어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조종했다. 이 신디케이트 조직은 2001년 해체될 때까지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공급과 가격을 쥐락펴락했다.


어니스트의 행동은 미국의 반감을 샀다. 그는 2차 대전 중에 군수물자 생산에 필요한 다이아몬드를 미국에 공급하지 않은데다 반독점 행위를 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니스트는 영국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면서 유대교를 버리고 영국국교회로 전향했다.



해리 오펜하이머


1957년 어니스트가 7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아들 해리 오펜하이머(Harry Oppenheimer, 1908~2000)가 드비어스의 회장을 승계했다. 해리도 어렸을 적엔 유대교 시나고그에 다니다가 기독교로 바꿨다. 해리의 시기에도 드비어스는 세계독점을 유지했다. 드비어스는 캐나다, 호주, 말레이시아, 포르투갈, 잠비아, 탄자니아 등에 지점을 설립하고 영업을 확대했다. 오펜하이머 제국은 다이아몬드 사업에서 번 돈으로 신문, 양조업 등에도 진출해 수백개 기업을 지배했다.


노천 다이아몬드 광산(the Big Hole  또는 Kimberley Mine으로 알려짐), 남아프리카 킴벌리, source: wiki.medi by Irene2005


해리는 남아프리카 백인정부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인종차별) 정책을 비난했다. 그가 인종차별을 반대한 것은 그의 도덕적인 시각에서 나왔다는 평가와 사업적인 이해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후자일 것으로 의심한다. 전세계에서 백인정부의 인종탄압을 비난했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고객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이 드비어스에 칼을 빼들었다. 드비어스의 다이아몬드 독점이 미국 반독점법으로 제소되었고, 드비어스사의 임원들은 미국 입국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오펜하이머가의 사업엔 타격을 입지 않았다. 고객들이 그들을 찾아 왔기 때문에 굳이 미국을 가지 않아도 영업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3년까지 앵글로어메리칸과 드비어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GDP의 10%, 수출의 30%를 차지했다.


니컬러스 오펜하이머


해리의 아들 니컬러스 오펜하이머(Nicholas F. Oppenheimer, 1945~ )는 일찍부터 경영수업을 받았다. 니컬러스는 23살이던 1968년에 앵글로어메리칸에 입사해 29세에 이사가 되었다. 그는 차근차근 오펜하이머 계열사들의 CEO를 맡았다. 오펜하이머 3대째인 니컬러스의 시대엔 드비어스의 다이아몬드 독점이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 다이아몬드가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호주와 캐나다에서 새로 개발된 다이아몬드 광산이 드비어스 신디케이트 참여를 거부했다.


드비어스는 카르텔 밖에서 쏟아져 나온 저가의 물량을 매입하면서 가격을 지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카르텔을 벗어난 물량이 많은데다 적자를 보면서까지 물량을 소화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피의 다이아몬드’(Blood diamond)에 대한 비난 여론도 높아졌다. 아프리카 저항세력들이 강제노동을 통해 채굴한 다이아몬드를 세계시장에 흘리며 군비를 충당했는데 이에 대한 반감이었다.


드비어스의 세계다이아몬드 지배력은 1980년대 90%를 정점으로 급락했다. (2019년 드비어스의 세계시장 지배력은 29.5%다.) 다이아몬드의 공급지는 점차 늘어나고, 미국을 비롯해 각국에서 다이아몬드 시장의 투명성 요구가 점점 높아졌다.


니컬러스는 서서히 오펜하이머 가문의 몫을 내려 놓았다. 1982년 아버지 해리가 은퇴하자 모기업인 앵글로어메리칸의 CEO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니키는 드비어스 회장직만 유지했다. 남아프리카에 흑인정권이 수립된 이후 회사 경영진에 흑인들을 참여시켰다.


2000년 해리가 죽고, 니키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2011년 니키는 드비어스의 지분 40%를 앵글로어메리칸에 매각했다. 매각 대금은 32억 파운드, 미국돈으로 51억 달러였다. 이로써 오펜하이머 가문은 세계최대 다이아몬드 회사 드비어스에 대한 경영권을 85년만에 내려 놓았다.


드비어스 지분 45%를 갖고 있던 앵글로아메리칸은 지분율이 85%로 높아지게 됐다. 나머지 15%의 지분은 보츠와나 정부가 소유하고 있다. 오펜하이머 가문은 1926년부터 드비어스를 경영하며 '다이아몬드 왕조'란 별명을 얻었다. 한때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90%가 드비어스를 통해 공급됐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러시아 알로사 등이 새롭게 시장에 뛰어들며 독점 구조가 깨졌고 점유율은 36%까지 내려왔다.


조너선 오펜하이머


이미 이야기한대로 이번에 드비어스 지분을 사들이는 앵글로아메리칸도 오펜하이머 가문이 세운 회사다. 어니스트 오펜하이머가 1917년 앵글로아메리칸을 세웠고 9년 뒤 드비어스를 인수했다. 드비어스와 달리 앵글로아메리칸은 상장사이며,오펜하이머 가문이 지분 2%를 갖고있다. 니키의 아들 조너선 오펜하이머(Jonathan Oppenheimer, 1969~)는 드비어스사의 비등기 이사를 맡고 있다. 오너가문에 대한 예우차원이다.


드비어스는 5개 대륙에 3만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세계 다이아몬드 원광석의 30% 정도를 생산한다. 오펜하이머 가문이 떠나간 후 드비어스는 2020년에 최악의 수익을 기록했다. 이제 다이아몬드 시장은 완전히 달라졌다. 공급처는 점차 다각화됐고 인공합성 다이어몬드도 상업성을 갖출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오펜하미머 성씨 이야기와 드비어스와 관련된 오펜하이머 가문 이야기다.


참고문헌


1. 그림에서 보석을 읽다, 원종옥, 이다미디어, 2009

2. 다이아몬드 잔혹사, 그레그 캠벨, 작가정신, 2004

3. 보석, 세상을 유혹하다, 윤성원, 시그마북스, 2015

4. 한권으로 읽는 욕망의 역사 다이아몬드의 세계, 다마키 도시아키, 미래타임즈, 2021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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